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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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술 구 묘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이재술 집
이재술(1901 - 1968)은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20년말 만주 길림성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무장단체인 흥업단(興業團)의 단장 김호(金虎)와 외교부장 김성규(金星奎)의 밀명을 받고 군자금 20만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에 파견된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을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2월 손기성(孫基聖)·권충락(權忠洛)·김연환(金璉煥)·최명해(崔明海) 등과 같이 이에 가입하였다. 그는 경북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1922년 6월 김창우(金昌佑)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대구지방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양제안, 양한기 집
양제안(1860 - 1929)은 대한제국기 정용기의 산남 의진에서 상주, 선산지방의 책임자로 활약한 의병장.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벽도(碧濤). 경상북도 영일 출신이다. 1876년(고종 13) 병인양요 때 격문을 만들어 척양척왜를 주장하였다.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 의병총본영을 설치하고 의병을 모집, 훈련시켜, 1895년 이기찬(李起燦)의병진의 중대장으로 허위(許蔿) 등과 청산·보은·괴산·청주·음성 등지에서 관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1905년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1906년 정용기(鄭鏞基)를 중심으로 영남지방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이 결성될 때 상주·선산지방의 책임자가 되었다. 산남의진의 봉기 후 주로 진후(陣後)에서 활약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양한기 묘
양한기(1880 - 1946)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이다. 친부(親父) 양제안(梁濟安)으로부터 손자병서(孫子兵書) 및 병법의 교습을 받고 1894년 4∼12월 진천(鎭川)에서 궁시(弓矢)·총탄제조 등에 종사하였으며 1895년 3월부터 1909년 1월까지 경북 영일군(迎日郡) 죽북면(竹北面)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양총(洋銃) 등 전쟁용 무기구입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1년 4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북 영일군 죽북면 두마리(斗麻里)에서 청소년들에게 조국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친부 양제안과 동생 양한위(梁漢緯)의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재산을 매각하여 후원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연준 순교시비
손연준(1902-1950)은 해방 이후 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된 목사로 호는 산돌이며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 손종일(1871-1945)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장로였으며 경남 함안군(咸安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2006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양원은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 중 궁성요배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으나, 선교사 맥레이(Macrae, L.)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한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부산 나병원교회,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동양선교회에서 일하던 중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손양원은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194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수정하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광복촌 유래비
광복촌은 1976년 정부가 주월동 소재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무주택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당초에 원호주택(광복촌)이란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졌으며 이태리식 주택(대지 약 165.2㎡, 건물 약 79.3㎡)으로 하나의 설계도로 열두 채를 지어 집 모양들이 비슷했다. 당시 집을 짓는 비용 200만원 중 정부에서 50만원을 지원하고 100만원은 융자, 50만원은 자부담이었다. 당시로써는 고급주택으로 분류돼 형편이 어려운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건축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 광복촌에 살았던 독립유공자는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연락 활동을 했던 최봉진 선생을 비롯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창하‧송동식·조길룡 선생 등이었다. 또 한말 의병장인 심남일 선생과 일제항거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한 이홍빈 선생,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동훈 선생 후손도 광복촌에서 함께 생활했다. 현재 광복촌 자리에는 윤창하 선생의 주택이 유일하게 보존돼있다. 2021년 광주광역시 남구는 광복마을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료 조사와 연구 용역을 거쳐 그 유래를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김윤식 시비
김윤식(1902 - 1950)의 이명은 김영랑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康津面) 남성리(南城里) 자택에서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아라 묘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윤호 공적비
이윤호(1898-1931)는 광주의 3.1운동을 주도했던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당시 21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윤호는 1919년 3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동생 이창호, 처남 유계문(劉桂文)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기각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5월부터 1922년 9월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인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노진영(盧軫永), 신대선(辛大善) 등에게 권총을 가지고 군자금 모집에 관한 취지문을 발송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1924년 12월 31일까지 옥고를 치렀다.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문동길 공훈비
문동길(1900-1997)은 일제강점기 곡성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동지 김성현(金聖炫)·김제중(金濟中)과 같이 단체명 미상의 소속원 신덕채(申德采)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의 밀지를 받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1920년 음력 2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박운아(朴雲娥)의 집에서 회합, 협의하였다. 여섯 번에 걸쳐 곡성·담양 등지의 유력가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원임을 밝히고, 군자금조로 현금 및 갹출증서·물품 등을 거두어들이는 활동을 폈다. 1921년 광주군 석곡면 김두길(金斗吉)의 밀고로 잡혀 1921년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6년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홍두 공적비
김홍두(1879 - 1933)는 전남 광산(光山) 사람이다. 1916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을 중심으로 1915년에 결성된 혁명단체로서 주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폈다. 그런데 1918년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김 구(金九) 등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들과 연락·접선·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런 뒤 각지 청년회와 연락하며 임시정부의 통신기관(通信機關) 설치에 힘쓰는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남(全南) 나주(羅州)에서 붙잡혔다. 동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6년 전남 장성(長城)에서 군자금 모집중 장성경찰서에 붙잡혀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광주독립운동기념탑(상무시민공원)
광주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2014년에 건립되었다. 상무시민공원 내 부지 480㎡, 높이 14m 규모로 총공사비 8억 여원을 투입 조성됐으며, 탑과 조형벽, 동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탑 아래쪽 기단에는 광주독립운동 관련 유공자 1124명의 이름을 새겼고 탑신 주변에는 서재필(대한민국장), 양한묵(대통령장) 등 광주·전남 독립유공자 1,000여 명의 명단을 새겨 조국 독립을 위해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선열들의 뜻이 후손들에 길이 기억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