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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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신철희 집
신철희(1895 - 1965)는 1920년 음력 8월경 경북 청송(靑松)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겉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흠치교는 교주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같은 조직구성으로 흠치교는 경북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24년 갑자(甲子)해에 흠치교의 힘에 의해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모집 및 교도증대에 힘을 쏟았는데, 신철희는 8인조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신철희는 이 일로 인해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철희 유지비
신철희(1895 - 1965)는 1920년 음력 8월경 경북 청송(靑松)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겉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독립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흠치교는 교주 밑에 60인의 고문을 두고, 각 고문 밑에 6인조, 6인조 밑에 각 12인조, 12인조 밑에 각 8인조, 8인조 밑에 각 15인조 등을 두는 조직 체계를 구성하였다. 이 같은 조직구성으로 흠치교는 경북 일대에서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 이들은 1924년 갑자(甲子)해에 흠치교의 힘에 의해 조선이 독립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면서 자금모집 및 교도증대에 힘을 쏟았는데, 신철희는 8인조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신철희는 이 일로 인해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여 1921년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면소(免訴) 처분을 받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법전사 3.1독립운동순국선열 도량
법전사는 1977년 3월 24일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의 영혼을 안식하기 위해 창건한 것이다. 대웅전은 1977년 건축되었으며, 요사채는 1979년 건축되었다. 2003년 4월 11일 요사채와 일사문을 증축하였고 2004년 8월 27일과 2005년 1월 5일 요사채를 증축하였다. 법전사에는 3.1독립운동순국선열 구국열사봉안 도량도 함께 위치해 있다. 백용성(용성조사) 선생과 변진설(봉암조사) 선생께서는 법전사에서 수행하셨으며, 봉암조사는 용성조사의 제자이시다. 법전사는 봉암스님의 제자께서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해 최고 접전지역이었던 다부동에 법전사를 창건한 것이다. 백용성(1864 - 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변진설(1909 - 1975)은 전남 광주(光州)에서 학생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진설은 1928년 6월 전남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 재학 중 학우 이경채(李景采)의 퇴학처분에 항거하여 그의 복교(復校)를 지지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 측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생들과 함께 6월 26일에 교유(敎諭) 7명의 사직 또는 반성을 요구하였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과 이경채의 복교사항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전개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변진설은 학우들과 함께 맹휴중앙본부(盟休中央本部)를 조직하고 「집행본부경과보고(執行本部經過報告)」, 「광주고보교 학생 일동 항의문」, 「중앙본부격(中央本部檄)」이라는 이름의 문서 수백 통을 등사 인쇄하여 학생과 학부모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맹휴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격문을 제작·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1928년 8월 2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변진설은 3개월이 넘게 취조와 심문을 받고, 1928년 10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8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수목 이두석 집
이수목(1890 - 1978)은 1915년 음력 1월 15일 경북 달성군(達城郡) 수성면(壽城面) 안일암(安逸庵)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단원으로 참가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기로 맹세하고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하였다. 1944년 8월 10일 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祜) 등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예지하고, 일본의 패망과 조국건설에 대한 논의를 거쳐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부 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 등을 맡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두석(1912 - 1938)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왜관(倭舘)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 맹휴를 주동하다가 퇴학당한 정행돈(鄭行敦)·이창기(李暢基) 등과 함께 1932년 4월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고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활동을 펴며 민족의식을 길렀다. 그러던 중 활동내용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2월에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일경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동년 3월 23일 대구경찰서 유치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석 집(이석고택)
이석(1910 - 1978)의 이명은 이이석이며, 1927년 11월 경성제1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재학 중 ‘식민지교육 타파’를 주장하며 동맹휴학(同盟休學)을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에는 서울에서 정종근(鄭鍾根)·권유근(權遺根) 등과 함께 학생단체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무렵 그는 광주학생운동으로 학생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자, ‘검속된 조선 학생을 탈환하고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라’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 식민교육의 부당성을 꾸짖으며 한편으로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격문 배포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0년 12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이석은 고향인 경북 칠곡군(漆谷郡)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최소복(崔小福)·정칠성(鄭七星) 등과 함께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협의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協議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활동을 전개했으나,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8년 2월경 체포되어 4년간 취조를 받고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수호기념비
독립수호기념비는 '천지와 같이 이 나라에 살 것이로다. 그 끝까지 이 나라 독립을 수호하리.'라는 문구를 통해 영원히 국가의 독립을 쟁취하고 자주권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정행국, 정행돈 추모공원
정행국(1896 - 1921)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4년 8월 서울에서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학생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추적을 받게 되자 만주로 건너가 길림(吉林)·장춘(長春) 등지에서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한다. 1919년 5월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왜관청년회(倭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어 동회의 활동을 주도하였으며 동창학원(同昌學院)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21년 10월 왜관청년회 주최로 <나의 조국은 죽지 않는다>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1921년 11월 병보석되었으나 다음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 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정행돈 기념관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동창학원 표지석
동창학원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교육기관이다. 1922년 4월 7일 왜관청년회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학교로, 개원하자마자 원생이 크게 늘어 한 달여 만에 17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 칠곡군 유일의 사학 기관이었으며 채충식 등 청년회 활동가들이 교사로 되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수목(李壽穆), 박희중(朴喜重), 이상호(李相祜) 등 3명이 자진하여 각자 1백 원의 유지비를 부담하여 운영자가 되기로 한 후 이수목이 중도 탈락하고 후임으로 이강진(李綱鎭)이 참여하여 세 사람이 1년간 350원의 유지비를 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세 사람이 부담액을 내어 놓지 않아 강사의 월급도 지불하지 못하게 되자 학생 수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급기야 폐교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경상북도에서 지방비와 향교 재산 수입의 일부를 지원받아 학원 운영비로 사용하였는데, 그 금액은 1년에 약 300원에 달했다. 또 왜관곡물상조합의 보조까지 받아 학원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1929년의 큰 가뭄으로 인해 군청과 향교에서는 지원을 거부하였고, 지방 재산가들은 학원에 관심이 없음으로 인해 학원 운영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때 지방유지 등이 기금을 모았는데, 그 금액이 2백 47원이었다. 이렇게 하여 학교 운영의 위기를 넘겼으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라 1932년 6월 20일에는 무기 휴교를 단행하였고, 운영 필요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폐교해야 될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왜관곡물상조합에서 곡물 매매를 하면서 마련한 수수료로 학원 운영 경비를 다시 충당되면서 폐교의 위기는 넘기게 되었으나 학원의 원활한 운영에는 부족하였다. 그로 인해 학원 시설과 학생 수는 점차 줄어들었고, 해마다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정행돈 흉상
정행돈(1912 - 200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31년 11월에 동교의 친일 교유(敎諭)에 대한 배척투쟁을 벌이다가 강제로 퇴교당했다. 그후 1932년에는 고향인 왜관(倭舘)에서 이창기(李暢基)·이두석(李斗錫)과 함께 청년동지회(靑年同志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 및 한글강습 등의 항일활동을 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8년 붙잡혔으며, 1939년 10월 25일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이송되어 1941년 3월 7일 대구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免訴)되어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최준 흉상
최준(1884 - 1970)은 경북 경주(慶州) 사람이다. 그는 경주 지방의 대지주(大地主)로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관계하면서 거액의 자금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특히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朴尙鎭)과는 사촌 처남의 관계로 자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대한광복회의 재무(財務)를 맡기도 했다. 그리하여 대한광복회가 발각될 때, 이에 연루되어 붙잡히기도 했던 그는 3·1독립운동 이후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역시 거액의 자금을 송달하였다. 그가 송달한 자금의 액수가 얼마만큼 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으나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경영하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가 1백여만원의 부채를 지고 파산될 만큼 거액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보내기로 한 청원서에 경주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인수 유적비
김인수(1898 - 1939)는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8년 10월 5일 제주도(濟州道) 남제주군(南濟州郡) 좌면(左面) 법정사(法井寺)에서 일어난 항일 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스님인 김연일(金連日) 등은 1918년 9월 19일, 신도 30명에 대하여, "왜노(倭奴)가 우리 조선을 병탄(倂呑)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倂合)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불원(不遠)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나 우선 제일로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상인(商人)들을 도외(島外)로 구축하여야 한다"고 말하며 거의를 촉구하였다. 마침내 10월 5일, 신도 33명을 소집하여 김연일은 스스로 불무황제로 칭하고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으로 임명한 후, 김인수 등에게 각각 반수(班首)의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김연일은 도대장 이하 군직을 명하여 대오(隊伍)를 편성하고 각면 이장에게 격문을 배포해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모인 항일봉기군은 400여 명이나 되었다. 김연일·김인수 등의 주도자들은 봉기군을 지휘하여 전선을 절단하고 서귀포(西歸浦) 호근리(好近里)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보고 받은 일경들이 미리 서귀포에서 무장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자,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그곳에서 일경과 대치하도록 하고, 그와 김인수는 봉기군 일부를 데리고 중문주재소(中門駐在所)를 습격하였다. 주재소장 길원(吉原)은 갑작스럽게 닥친 봉기군을 방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주재소를 파괴·소각하고 일경 3명을 포박하였으며,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는 등 활동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