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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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설 기적비
권오설(1897 - 1930)의 아호는 오서, 이명은 권일, 권부덕, 권형신이며, 일제강점기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를 지낸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말에 고향으로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워 청소년을 교육하였다. 1920년 일직면에 일직서숙(一直書塾)과 일직면금주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가곡농민조합을 조직하였고,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도 입회하였다. 안동청년회 집행위원을 지내면서 1922년 풍산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산학술강습회를 열어 인재를 양성하면서,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이 되었다. 풍산소작인회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와서 신흥청년동맹과 한양청년연맹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비밀조직인 코민테른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합법 사상단체인 무산자동맹회와 화요회, 혁청단(革淸團), 불꽃사〔火花社〕 등에 참여하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12월 남부지방을 순회하며 조직을 확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인쇄 직공조합 조직 결성과 파업에 참여하였고, 전차 승무원 파업과 양화직공 파업 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1월 안동의 사상단체 화성회(火星會)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자매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 창립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2월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어 조직을 재건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국장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중심으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천도교 구파와 함께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직전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0년 4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간회 안동지회 독립운동 본거지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
독립운동 대표마을 하회마을 표지석은 하회마을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리고자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세운 표지석이다. 풍산류씨 600년의 역사가 깃든 하회마을은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호국충절의 고장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학문을 닦고 덕행을 기르는 처사의 삶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분연히 일어나,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류도발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하였고, 아들 류신영도 1919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목숨으로 저항한 장엄한 역사를 남긴 것이다. 3월 27일에는 마을소년 20여명이 만송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류점등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0년대 들어 류창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류병하는 의열단 의거로 고초를 겪었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류택하는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펼쳤고, 류시승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나라밖에서는 류소우와 그의 아들 류시보, 조카 류시훈이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 창립지(보광학교)
신간회 안동지회가 창립된 보광학교(普光學校)가 있던 곳이다. 1927년 2월 좌.우를 아우른 신간회(新幹會)가 탄생하였다. 신간회는 전국에 150여 개 지회를 가진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1927년 2월 15일 서울에서 좌우합작을 통한 신간회의 결성과 더불어 안동 지역에 설립된 신간회의 지회이다. 안동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적 조직체였던 화성회(火星會)가 1927년 4월 해체를 선언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27년 7월 9일 정현모·김중학·심규하·이술상·권태석·이세녕·권중열·문재빈 등 20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고 신간회 안동지회 설립준비위원회가 열렸다. 같은 해 8월 26일 각 면에서 발기인을 모집하여 197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장에는 류인식(柳寅植), 부회장은 협동학교 출신으로 우파 독립운동의 대표자 정현모, 그리고 간사는 권태석을 비롯한 좌·우파 24명이 맡았다. 1928년 1월 임원이 개선되면서 정현모가 회장을, 권중열이 부회장을 맡았으며, 24명의 간사진, 20명의 대표위원, 7명의 후보가 각각 선정되었다. 이후 1930년 경북공산당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임원들이 구속되면서 활동의 폭이 좁아졌고, 1931년 안동콤그룹이 조직되면서 해소되었다. 초기 활동은 조직 관리와 확대 방침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1927년 9월에 열린 간사회에서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에 관한 건’, ‘안동고보기성회(安東高普期成會) 사건에 관한 건’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1920년대 안동 사회단체 활동의 일환이었던 계몽운동을 계속 전개하였으며, 정치문화부에 일임하여 강연회를 통한 대중계몽운동을 펼쳤다. 1927년과 1929년 2차례의 대규모의 강연회를 열고, 순회강연회·학술강연회·농촌문제강연회 등 소규모의 강연회도 지속적으로 펼쳤다. 한편 풍산소작인회의 농민운동을 지원하면서 소작료 투쟁권, 세금공과금 지주부담, 비료대 이자의 지주부담 등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그 외 신간회 안동지회가 펼친 사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향교철폐운동이었다. 일제의 민족 분열 정책으로 인해 향교가 친일적인 측면으로 방향을 바꾸자 정기총회에서 향교의 철폐·향교 재산처리권의 획득·유도진흥회의 철폐 등을 결의하고, 신간회 영주지회·봉화지회·영양지회와 함께 철폐운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는 창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 안동 지역에서 가지는 위상은 그 어떤 단체보다 높았다. 비록 유림 출신 인물들이 앞장선 단체였지만, 안동의 좌·우파들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연합체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또한 신간회 안동지회가 700여 명의 회원을 가진 대규모의 단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안동 지역 사회의 관심과 참여도가 매우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주억 집
박주억(1909 - 1934)은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이태을(李太乙)·박수봉(朴壽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院里洞)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주억 집 터
박주억(1909 - 1934)은 1927년 6월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산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石保支部) 집행위원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영양지회(英陽支會) 집행위원을 지냈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던 1930년 2월 8일 그는이태을(李太乙)·박수봉(朴壽奉)·이돌몽(李乭蒙) 등의 동지와 함께 영양청년동맹의 석보지부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국내정세와 독립운동의 방안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일제의 총독정치는 한민족을 억압하여 자유를 구속하고 있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현재 광주학생운동의 양상을 볼 때 일제가 한국인 학생만을 구속하거나 퇴학처분하고 있으며 광주는 물론 전국에서 학생과 민중들이 함께 궐기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석보면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펴야한다는데 뜻을 함께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동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院里洞)의 장날을 이용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일제의 총독정치를 반대하는 격문 8백여매를 인쇄하여 거사 당일 장터에서 2백여명의 군중에게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30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영양청년연맹 석보지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永陽靑年同盟石堡支部)는 석보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 모임의 이름이다. 당시 김수봉(金壽鳳), 박수봉(朴壽奉), 박주억(朴周億), 이돌몽(李乭蒙), 이성암(李成岩), 이태을(李太乙), 이현량(李鉉良)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1930년 2월 8일 회관에 모여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석보면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1930년 2월 11일 석보면 원리동 장날에 격문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원리장날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규탄하고, 광주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내용의 격문을 800여 장 배포하고, 만세운동을 펼쳤다. ‘영양격문사건’으로 보도된 이 만세운동은 영양청년동맹과 석보지부의 근간을 흔들었다. 이 때 체포된 이들은 영양청년동맹 석보지부 회원이자 신간회 영양지회 회원이었고 노동야학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회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3월 25일 방청이 금지된 상황에서 1차 공판이 열렸다. 박수봉(朴壽奉)·박주억(朴周億)·이태을(李太乙)·이돌몽(李乭蒙)은 징역 2년, 김수봉(金壽鳳)·이성암(李成岩)은 징역 1년 6개월, 이현량(李鉉良)은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석보지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던 영양청년동맹도 그 활동이 자유로울 수 없어서 영양지역 청년회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영양호국공원
영양 호국공원은 부지면적 3만548㎡에 총사업비 32억여원을 들여 신규로 준공한 것으로 충혼탑과 베트남 참전기념비를 비롯해 무공수훈자전공비, 삼의사비, 독립운동합동기념비 등을 이설하고 공원조성, 광장, 주차장 등 부대시설을 설치했으며 지난 2009년 착공해 2012년 6월 준공됐다. 이곳에 세운 독립운동 합동기념비는 영양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07명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87년 영양읍 서부리에 건립됐다. 기념비에는 107명의 이름을 새겨 넣어 후세의 귀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영양3의사비는 영양군을 대표하는 독립유공자인 김도현, 남자현, 엄순봉 지사를 추모하기 위해 1977년 건립된 것이다. 김도현은 한말의 항일 의병장으로 영양·안동 지방의 의병을 모아 항전했고, 영양에 영흥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망국을 개탄하는 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했으며 혈서 '조선독립원'을 작성하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일본 만주국대사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순봉은 1933년 북만주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 청년부장이 되었으며, 재만조선인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한 뒤 백정기·정화암 등과 상해로 갔다. 1935년 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으로 있던 친일파 이영로를 처단하여 1936년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김도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남자현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에는 엄순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창의순절기념비(청기면)
창의순절기념비는 벽산 김도현선생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말 의병항쟁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려는 다짐을 담아 1988년 광복절에 세웠다. 전국에서 1894년부터 1909년까지 전개되었던 한말 의병 항쟁 중 벽산 선생이 앞장서서 펼친 투쟁은 1896년 영양의병, 예안의병, 강릉의병 그리고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다시 일어나 이듬해까지 활약한 영양의병이었다. 함께 나선 인물로는 안동의병 류시연, 상주 태봉전투를 치러낸 예안의병 이만도, 이중린, 이인화, 삼척전투를 함께 벌인 강릉의병 민용호, 그리고 벽산의 친동생 김동현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알려지지 못했지만 청기 농민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하겠다. 이곳에 함께 새겨진 분들의 성함은 아래와 같다. 의거참전의사 김도현, 권한모, 김영섭, 김호현, 이만도, 오유승, 김예흠, 김계현, 조승기, 정득만, 김재흠, 심의영, 김병식, 김홍제, 김약흠, 정태모, 유시연, 김문제, 김두현, 김명제, 정덕순, 김봉제, 김익흠, 김상조, 심계오, 권양오, 김성춘, 김상진, 박수종, 안광옥, 김동흠, 남조한, 이중언, 송지학, 김영찬, 안경순, 고인식, 정규현, 김용술, 박석래, 정성담, 박노석, 김한현, 김순흠, 남종언, 권위동, 김상현, 김용흠, 이원여, 한개동, 김석현, 김장흠, 이경담, 김상훈, 김서현, 김성락, 이오동, 권위업, 김직현, 이인화, 유회식, 김성수, 남규원, 유지호, 김성박, 김영두, 김찬명, 김서술, 정치모, 김영조, 김영기, 조병희, 김경흠, 김영우, 오석인, 김보현, 김원흠, 신충일, 김락현, 김대현, 정건모, 김성모, 김만현, 유연박, 김락서, 김성학
김도현 유허비
김도현(1852 - 1914)의 자는 명옥, 호는 벽산, 이명은 한자가 다른 김도현(金燾鉉)이며, 을미사변 이후 대한제국 강제 병합 이전까지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 직후 의병을 일으켰다. 일족들과 함께 검산(劒山)에 본거지를 두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募兵)하였다. 이 무렵 유시연(柳時淵) · 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 입성을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에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안동 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趙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 · 의성(義城) · 영덕(盈德) · 영해(寧海)를 순방하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렬(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가면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이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본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군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때를 제외하고는 경상북도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 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시기 의병장 중에서 가장 오래 투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인 후 각 고을에 통문을 보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가서 통문을 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멈추고 귀향하였다. 1906년 4월에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였다.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4년 부친의 사후 투신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김성규 집(조지훈 처가)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 양선 김성규(1904~1946)의 가옥이 있던 자리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김성규는 무섬마을의 문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는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홍수로 인해 김성규 가옥이 유실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 가옥마저 잦은 수해와 퐁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 터로 남아있던 중, 1999년 무섬마을이 경북북부 유교문화사업 대상지역으로 지정되어 김성규 옛 가옥이 다시 복원되었다. 김성규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 후 서울 중동중학교 본관에서 신학문을 배운 선비로서 일제 강점기에 김화진등 마을 유지들과 함께 무섬마을에 아도서숙을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에 힘쓰는 한편 신간회 영주지회 집행위원, 총무간사와 영주 청년동맹 집행위원장을 맡아 지역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8월 일경에 체포되어 금고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화진 집(해우당)
김화진(1904 - 1946)은 1922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수료하였으며, 1924년 5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고무공장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였다. 1928년 2월 귀향하여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는데, 귀향 다음 날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 가입하였다. 1927년 11월 24일 조선청년총동맹의 부군청년동맹 결성 방침에 따라 영주청년회와 풍기청년회가 합쳐져 영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김화진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9년 김화진은 영주청년동맹 집행위원 김계등(金季登)[1907~?]과 함께 순흥청년회 해체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주청년동맹 창립 이후 순흥 등 각 면에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해산되어야 할 순흥청년회가 해산하지 않고 영주청년동맹의 활동 방침과 다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김화진은 김계등과 순흥청년회 총무 차병섭(車秉燮)을 만나 해산을 압박하였다. 이로 인해 1930년 9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김화진은 1929년 1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영주지회 정기대회에서 대표회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7월 30일 열린 신간회 영주지회 임시대회에서는 집행위원 겸 대표회원으로 선정되었다. 1929년 영주 지역에서 한해(旱害)가 발생하자, 구제연설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김화진은 서대(西隊)에 편성되어 영주군 풍기면와 순흥면을 맡았다. 1929년 6월 신간회 영주지회가 영주 읍내에서 과자 행상을 통해 운영비를 마련할 때, 평은면과 문수면을 대상으로 한 제3대에 편성되었다. 1929년 3월 풍기농우동맹이 해산되고 영주농민조합이 결성될 때 김화진은 검사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영주농민조합은 금계와 이산에 지부를 설치하고, 단일 농민조직 체계를 갖추어 나가면서 2,352명의 조합원을 확보하였다. 김화진은 1931년 9월 김봉호(金鳳鎬)[1884~1950]·김계등·박병성(朴炳星)[1904~?]·정규찬 등과 함께 농민운동과 반제동맹을 전개하기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32년 4월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김화진은 김계등·김준상(金俊相)[1910~?]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조직을 맡았다.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가 조직하려는 혁명적농민조합의 목적은 노동자·농민에 의한 독재 정부 수립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는 이를 일본 제국주의 몰락의 시작으로 확신하면서, ‘출병 반대’, ‘제국주의 전쟁 반대’, ‘소비에트 러시아 사수’, ‘중국혁명 지지’ 등을 강조해 나갔다. 1932년 7월경 영주공산주의자협의회의 활동을 예의주시하던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과 형사와 영주경찰서 및 봉화경찰서 경찰에 의해 김화진 등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1933년 12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