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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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흠 묘
이동흠(1881 - 1967)은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한말 우국지사 이만도(李晩燾)의 손자이다. 그는 1918년 4월 2일 경북 봉화군(奉化郡)의 부호 이정필(李廷弼)에게 군자금으로 천원을 헌납하라는 광복회(光復會) 명의의 통고문을 발송하였으나, 이와 관련하여 면장(面長) 이명호(李明鎬)와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1925년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한 경북유림단(慶北儒林團)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경북유림단은 중국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 및 황무지 20만정보를 매입하여 남북만주의 동포들로 하여금 개간토록 한 후 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할 것을 계획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을 모금코자 하였다. 이동흠은 정수기(鄭守基)를 통하여 유림단의 이러한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뜻을 같이하여 군자금 모금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26년 1월 경북 달성(達城)·영양(英陽) 등지에서 최해윤(崔海潤)·이현병(李鉉秉)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펴던 중 1926년 5월 1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27년 2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면소(免訴)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중업, 김락 묘
이중업(1863 - 1921)은 일제강점기 『기암유고(起巖遺稿)』, 『대학정의(大學精義)』 등을 저술한 유학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광초(廣初), 소자는 계상(桂祥), 호는 기암(起巖). 이황(李滉)의 12세손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승지(承旨) 이만도(李晩燾)인데, 경술국치 후에 단식(斷食)으로 순국하였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승하(權承夏)의 딸인 숙부인(淑夫人)이다. 처음에는 숙부에게서 가학을 닦았으며, 후에는 김흥락(金興洛)에게서 수학하였다. 1919년 그는 고종황제 장례에 참석하여 3·1만세운동을 보고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에 내려와 유림들을 규합하여 파리만국회담에 참가할 일을 도모하고,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하여 서명운동을 일으켰다. 이 후 집을 떠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당시의 시대 상황과 세계의 정세를 탐문하고 유림들의 애국 충정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애국 지사를 방문하여 광복운동을 의논하였다. 결국 병이 나서 1920년에는 고양(高陽)의 산사(山寺)에 기거를 했는데 자식들이 귀가하기를 간절히 청했으나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광복을 위해 고생하는데 집에 편히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퇴계집』과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탐구하였고, 우리 나라와 중국의 역대 역사 및 왕조의 치란(治亂)과 선유 제현들의 학문 및 그 특징과 차이점 등에 대해서도 정통하였으며, 우리나라 세가(世家)들의 보계(譜系)에도 밝았다고 한다. 저술로는 『기암유고(起巖遺稿)』 28권 14책, 『대학정의(大學精義)』·『양전합선(兩全合選)』 등이 있다.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김락(1863 - 1929)은 일제강점기 예안군에서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김락(金洛)은 예안군(경상북도 안동) 3·1만세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친정과 시가가 모두 항일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친인척 중에 추서된 독립운동가가 무려 25명이나 된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김락이 참여한 예안 3·1만세시위는 고종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李東澤)·신응한(申應漢) 등이 서울의 시위를 직접보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하면서 계획이 추진되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경 3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시장 주변에 모여 있던 3개의 시위대 100여 명이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시위대는 미리 정보를 탐지하고 수비대까지 동원한 일본 경찰의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동봉의 인솔 하에 예안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되었으며, 시위 군중들이 해산 당하였다. 오후 6시경, 다시 격분한 시위군중들이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로 몰려왔다. 경찰의 해산 명령에도 불구하고 1500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은 돌멩이와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다시 25명이 체포되었다. 3월 22일 다시 2차 시위가 일어나 오후 7시에 약 2000명의 민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는데, 김락도 그 중 한 명이었다. 2001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서벽 항일의거기념비
1908년 5월 15일 일본군은 서벽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500여 명이 5월 19일 봉화를 습격하고, 20일에는 영주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영천수비대는 풍기분견소와 주재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서벽전투는 1908년 5월 17일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령을 넘어 두내리를 경유해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민긍호 부대와 이강년 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서벽전투가 있었던 격전지 자리인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350(서벽초등학교 교정 입구)에 1984년 12월 항일의거기념비를 세워 서벽전투의 승전과 항전의병들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다.
권상경 집
권상경(1890 - 1958)은 김창숙(金昌淑)의 만몽(滿蒙) 황무지 개척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협조하였다. 김창숙은 만몽(滿蒙)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그 수익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동시에 만주에 있는 조선청년으로 하여금 무기를 훈련하여 마침내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에 들어와 영남 부호들에게 그 자금 20만원을 거두기로 하고 1925년 6월 하순 북경을 떠나 조선에 들어왔다. 그해 10월 김창숙은 경북 봉화군(奉化郡) 부호 권상경(權相經)에게 이상의 군자금을 청구했고, 그는 이러한 자금 모집에 응하여 총 천원의 자금을 제공하였다가 1926년 5월 9일 경북경찰부(慶北警察部)에 체포되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태고정 망미대
망미(望美)라는 말은 중국의 소식(蘇軾 :소동파)의 적벽부(赤碧賦)중 묘묘혜여회(渺渺兮余懷)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따온말로 그 뜻은 “아득하고 아득한 나의 회포여, 미인(임금)을 하늘 저 끝에 바라보도다”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망미대(望美臺)는 대(臺)를 쌓아 임금을 그리며 국운회복을 염원한 곳이다. 태고정 망루 망미대는 강필이 지은 곳이다.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필 집
강필(1878 - 1942)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그는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金昌淑) 등이 세운 이상촌 건설에 찬동하여 2천 원의 군자금을 기부하였다. 1925년 김창국 등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 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봉화의 유지였던 그는 김창희(金昌禧)에게 군자금 2천 원을 전달하여 김창숙 등이 계획한 이상촌 건설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항일독립의거 기념탑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의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1919년 3월 23일 상주군 상주장터에서 상주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강용석과 성필환, 서울 중동학교 학생 한암회(일명 한감석[韓邯錫]), 상주공립보통학교 학생 조월연, 경성 국어보급학관 학생 석성기 등과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중순부터 계획을 세우고 1919년 3월 23일 오후 5시 30분경 상주장터에서 500여 명의 군중들과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87년 10월 18일, 상주 항일독립의거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에서는 상주 출신 독립운동가 40명의 항일투쟁의 정신을 기리고자 이 탑을 세웠다.
채기중 집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채기중 추모비
채기중(1873 - 1921)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 경상도 책임자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 경상북도 상주 출신. 1910년대 국내에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활약하였다. 1913년에 류창순(庾昌淳)·류장렬(柳璋烈)·한훈(韓焄) 등과 함께 독립군단체로서 의병출신자의 집합체인 광복단을 결성하고, 군자금을 수합하기 위하여 강순필(姜順弼)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월의 중석광산에 잠입, 활동하였다.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락을 취하는 한편 대구에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경영하던 애국지사 박상진(朴尙鎭)과도 연락하면서 1915년 초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을 협의하고 1915년 7월에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을 총사령으로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황해도 각지에 회원들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채기중은 경상도의 책임자였으며 전라도 조직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17년 11월 광복회가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할 때 이 공작을 직접 지휘하여 결행하였다. 1918년 광복회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자 상해로 망명하기 위하여 전라남도 목포에 잠적하였다가 붙잡혀 사형되었다.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광복의사단
구한말 국권회복과 일제하 독립을 위해 활동한 상주시 화북면 출신 이강년, 이용엽, 이원제, 이성범, 이용회, 이원녕, 김재갑, 홍종흠 등 8인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사당이다.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13도 창의군에 가담했고, 그 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갈기동·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피체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이성범은 상주에서 출생하여 1919년 4월 8일의 상주 화북면 문장산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운산 이용엽은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왜병을 말티재로 유인하고는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고 가은 이원재는 이강년 창의군의 좌종사로 활약하면서 군수물자의 조달에 헌신하였으며, 화은 이성범, 송사 이용회, 김재갑, 홍종흠은 3.1운동 당시 우리나라의 독립만세를 선도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6월씩 옥고를 겪었고, 간산 이원녕은 아우 한영과 함께 공주와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였다.
의사 유적비
상주 화북면에서 1919년 4월 8일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의사 전성희, 의사 정양수, 의사 손기찬, 의병장 김용준, 의병장 홍우선 유적비 5명의 선열을 추모하고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성주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는 1907년 대구에서 발의된 국채보상운동에 성주 유림의 대표였던 한계 이승희, 심산 김창숙 등이 주축이 되어 대부분의 문중과 마을이 동참한 업적을 기리고,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국채를 국민들의 모금으로 갚기 위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1907년 2월 중순대구의 광문사(廣文社)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은 단연(斷煙)을 통하여 국채를 갚아 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였다. 당시의 광문사는 지식인과 민족 자산가로 구성되어, 주로 실학자들의 저술을 편찬하고 신학문을 도입하여 민족의 자강 의식을 고취하고 있던 출판사였다. 또, 서상돈은 일찍이 독립협회 회원과 만민공동회 간부로서 자주독립 운동에 참여해 온 인사였다. 김광제ㆍ서상돈은 1907년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국채 1천 3백만 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되는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고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고 발기 취지를 밝혔다. 취지문을 발표한 뒤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 : 대구 광문사)는 민회소(民會所), 즉 단연회(斷煙會)를 설립하여 직접 모금 운동에 나섰다. 대동광문회의 국채보상운동 발기가 『대한매일신보』ㆍ『제국신문』ㆍ『만세보』ㆍ『황성신문』 등에 보도되자 각계각층의 광범한 호응이 일어났다. 서울에서는 2월 22일김성희(金成喜) 등이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를 설립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기성회는 회칙까지 제정하여 본격적인 운동의 채비를 갖추었다. 또, 수전소(收錢所)는 서점ㆍ약국ㆍ대한매일신보사ㆍ잡지사 등으로 지정하였다.그 뒤 전국에서 ‘국채보상’의 이름을 붙인 20여 개에 달하는 국채보상운동단체가 창립되었다.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였다. 특히, 6월∼8월에는 가장 많은 의연금이 모아졌다. 그러나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운동주체역량의 부족으로 인하여 1908년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운동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해 간 중심체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T.裵說)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사였다. 따라서, 이 운동은 사실 국권회복운동의 하나로서 전개되고 있는 셈이었고, 이에 일제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방해, 탄압하려 들었다. 일제는 1907년 이후 베델을 국외로 추방하는 공작을 펴, 1908년 5월 3주(週)의 금고와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통감부 당국은 “대한매일신보가 보관한 국채보상금을 베델ㆍ양기탁 두 사람이 마음대로 하여 3만원을 소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양기탁을 구속해 버렸다. 이른바 일제는 ‘국채보상금소비사건(國債報償金消費事件)’을 조작한 것이다. 통감부의 공작에 따라 전 국채보상지원금 총합 소장이었던 윤웅렬(尹雄烈)은 “보상금 중 삼만 원을 영국인 베델이 사취하였으므로 그 반환을 요청한다.”는 반환청구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를 근거로 운동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 주고자 하였다. 양기탁은 공판 결과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통감부의 공작으로 운동의 주체는 분열되어, 운동 자체가 암초에 부딪쳐 끝내는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