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쌈지공원 애국지사 안내판
일제강점기, 마산 지역도 여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특히 항구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상권과 관련한 침탈이 많았는데,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기반으로 마산 출장소 설치, 토지 박탈, 대일 미곡수출, 소비성 물품의 수출입항화 등이 자행되었다. 일제는 경제 침탈과 아울러 각종 학교의 설립을 통해 식민지화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마산에는 합병 이전부터 공립 마산 심상 소학교·마산 소학교·사립 일어 학교 등이 세워졌으며, 합병 이후에는 1915년에 마산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교에서의 교육은 처음부터 조선인을 위한 교육과는 무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할 민족 학교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마산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창신 학교가 설립되었다. 창신 학교는 국권 회복과 근대화 달성을 위한 실력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교육 목표로 마산 지역의 민족 교육 담당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정규 학교 이외에 야학도 민족 의식과 자주 독립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산의 노동야학은 지역 주민 옥기환·구성전 등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한·팽삼진 등이 교사로 참여하여 1907년 6월 10일 개교하였다. 노동 야학의 민족적 성격의 교육은 마산의 3·1 운동에서 앞장서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활동도 마산 3·1 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윤상태·서상권·배중세·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북 달성에서 독립군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였다. 마산에는 국권 회복단 지부가 설치되어 지부장 안확을 비롯하여 이형재·변상태·김용환 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에는 마산 항일 운동의 핵심 독립운동 인물들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활동 내용을 간략히 서술한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이광우 안내판
이광우(1825~1907)는 부산(釜山) 사람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초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열혈청년으로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울분을 금치 못하던 그는 1942년 5월 여경수(呂敬守) 등 5명의 동지들과 함께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당시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도발하면서 강제 공출, 징용 등으로 한국인에 대한 극악한 탄압을 더해가자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공장인 조선방직주식회사를 파괴할 것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집과 일제 군사요지 시설의 파괴도 추진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제작하여 공장 기숙사, 시장, 부두 등에 살포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노출되어 1943년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친일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불에 달군 화젓가락 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한 만행을 당한 후 검찰에 회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경수가 순국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5년 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채원개 김병일 부부묘
채원개(1895~1974)는 평남 영원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참가하여 항일전을 수행하다가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파견되었으며, 그후 중국군에 입대하여 1939년까지 고급장교로 복무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광동지부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가 광동으로 이전해 오자 이준식(李俊植)과 함께 임시정부 청사를 확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어 복무하였으며, 1943년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임명되어 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병일(1905~1971)은 평안남도 영원군 온화면 온양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5월 6일 채원개와 결혼했다. 김병일은 남편 채원개를 도와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 요원 가족들과 함께 중국 충칭으로 이동하였다. 1943년 5월 8일 충칭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각 당파의 통일 혹은 연합 방식으로 혁명진선을 공고히 하는 안」을 결의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 제2구 당원으로 참여하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1971년 6월 5일 별세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건식 오건해 부부묘
신건식(1889~1963)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박찬익 등과 함께 생활부조, 국사협력을 논의키 위해 만든 동제사(同濟社)와 대동보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4월 그는 중국군 중교로 항주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 우리 동포를 지원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조력하였다. 1939년에 중경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입법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데 심혈을 경주하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고, 1943년 3월 4일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차장에 임명되었다. 1944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감찰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의 확충과 운영의 묘를 살려 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건해(1894~1963)는 1940년 6월 정정화(鄭靖和)·김병인(金秉仁)·이헌경(李憲卿)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그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운동가 자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한국혁명여성동맹은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1940년 6월 17일 창립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요인들의 생계를 보살피고, 독립운동가 자녀들의 보육과 교육에 힘썼던 단체였다. 1943년 3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의 조직을 정리할 당시 제2구 당원이 되어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범석 김마리아 부부묘
이범석(1900~1972)은 1915년에 여운형(呂運亨)을 만나 중국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1919년 5월에 만주로 옮겨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진력을 다하였다. 1919년 5월 3일에 신흥강습소가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되고 정식으로 개교식을 하였으며, 그는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졸업증서 발행수도 1920년 8월까지 2천 호가 넘었으며 이 학교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로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1920년 3월 북로군정서로 가서 연성대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러가 중국은 중일 외교상 부득이 독립군을 간섭하게 되니 8월 10일에 독립군 부대 및 항일 단체에 대하여 국도변에서 멀리 옮기라고 교섭함에 그들과 타협하여 앞으로 국내 진입전 전개에 편리한 장백산 산속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8월 23일에 이동하던 중, 1920년 10월 5일에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곧 청산리(靑山里)에 당도하였다. 이때 일본의 토벌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우리 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편성하고 그는 연성대장이 되어 본대인 보병 1개 대대를 인솔하고 백운평(白雲坪) 숲 속의 유리한 지형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월 20일 9시경에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그날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킨 뒤, 그 다음날부터 23일까지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전지(戰地)를 옮기면서 일군의 주력부대를 강타하여 일본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대전과를 올렸다. 1923년 5월에는 김규식(金奎植)·고 평(高平)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군사교육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는 기병사령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만주, 노령 등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렸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특별반이 설립되자 그는 교육대장의 책임을 맡아 독립군간부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40년 9월 17일에 한국 광복군 창립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그는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의 마찰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광복군은 창립 당시부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광복군의 대표가 되어 중국의 정부, 국민당, 군사 당국자들을 만나 광복군 조직 확대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1942년 4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부서의 재조정과 함께 각 지대의 통합 또는 재편성이 이루어지게 되어 제1지대, 제2지대, 제3지대로 개편되었다. 그 가운데 제2지대는 역사도 깊고 인원의 수적인 비중이 컸던 관계로 전체 광복군의 핵심부대라고 인정되었는데, 제5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이 불의에 타계한 후 각지대 개편에 따라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그가 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제2지대장으로 서안(西安)에 부임하여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마리아(1903~1970)는 서울 성동 사람이다. 고려혁명군 정치공작대원으로서 서백리아에서 항일전투에 참가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참모장인 부군 이범석을 보좌하며 중앙군관학교 제7분교의 노어교관, 전간단 제7분단한청반의 노어·중국어 교관으로 광복군 대원 교육에 활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민영구 이국영 부부묘
민영구(1909~1976)는 서울 종로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고 망명하는 부친 민제호(閔濟鎬)를 따라 상해로 건너가 인성학교를 거쳐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선장으로 근무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지달수(池達洙)·나태섭(羅泰燮)·김태산(金泰山) 등과 함께 주계장(主計長)에 임명되었다. 1941년 11월 광복군이 서안으로 이전됨에 따라 광복군의 경리를 맡아 광복군의 살림을 꾸려 나갔다. 1942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직원에 임명되어 회계업무를 담당하였다. 1943년 독립운동자 가족을 사천성(四川省) 기강에 안주시키는데 많은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동년 3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의 주계과장에 임명되어 1944년 6월까지 계속 늘어나는 광복군 대원의 보급지원 등 조달업무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4년 6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내무부의 경무과원(에 임명되어 1945년 1월까지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업무를 맡았으며, 1945년 6월에 광복군 부령으로 광복군 총사령부 제2과에 소속되어 조국광복시까지 복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국영(1921~1956)은 충북 청주 사람이다. 1941년 6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조직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10월 10일에는 중경에서 3·1유치원이 설립되자 연미당(延微堂)·정정화(鄭靖和) 등과 함께 교사가 되어 중경에 거주하고 있던 교민들의 자제를 교육하였다. 1944년 3월 그는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 부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안재홍 동상
안재홍(1891~1965)은 경기 평택 사람이다. 1912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관술 유적비
이관술(1902~1950)은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이다.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12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했다. 1936년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적기(赤旗)』를 발간했다. 이후 대전 · 대구 등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면서 계속 활동을 모색했다.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여동생 이순금(李順今),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 · 배포했으며, 기관지 출판 책임자로서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1940년 2월 인천에 편집아지트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張順明)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검거되었다가,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이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위폐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이병호 동상
이병호(이명 이병찬, 1886~1955)는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15년 7월 15일 경북 대구 소재 달성공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고 일제고관 및 친일배의 주살(誅殺)과 일제기관을 파괴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할 때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6년 전남 보성군 겸백면장(兼白面長)으로 재직하고 있는 박문용(朴文鎔)이 겸백면내에서 거둔 세금 8천원을 받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달하며 활동하다 1918년 4월경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공갈·총포류단속취체령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섭 공적비
조병섭(1908~1950)은 7월 여수읍(麗水邑) 덕충리(德忠里) 장도(獐島)에서 문석·하순철·이창희(李昌熙) 등과 함께 ‘여수적색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직접 공장이나 직장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병섭은 항만노동부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경에는 조직의 부서를 개편하여, 조병섭이 조면공장노동부를 맡았다. 조병섭은 12월 여수읍 동정에 있는 정호영(鄭鎬榮)의 집에서 정충조·김석훈(金石訓) 등과 회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준비로서 먼저 공장과 직장에서 독서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교양하기로 하였다. 이에 정충조로부터 받은 「잉여가치란 무엇인가」 등을 교재로 혼다정미소(本田精米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10일경,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의 기관지 『적기(赤旗)』를 각지에 배포할 당시, 조병섭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에 체재하면서 이 지역의 배포를 담당하였다. 8월경 일본 경찰이 위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여 전국에서 8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조병섭은 체포를 면하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에서 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과거 노동구제회 오사카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홍기환(洪基奐) 등과 함께 그 조직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9월 일본공산주의자단에 대한 일제당국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같은 달 13일 동지 홍기환·정암우(丁岩又)·송정효(宋正孝)·김영동(金榮東) 등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괘불탱화의 태극기
탱화는 천이나 종이에 부처, 보살, 성현들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를 말하는데, 남원 선원사 명부전에 지장시왕도 괘불탱화가 있다. 지장은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며, 시왕은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을 의미한다. 명부전은 사람이 죽은 뒤 살아있을 때의 일을 심판받는 명부를 상징하는 곳으로,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신령과 부처가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따라서 사후에 10번의 재판을 주관하는 10명의 왕들을 모신 전각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인데, 제 6대 왕인 변성대왕 관모에 태극기가 그려져있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뇌록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8.5cmX3cm이다. 화기에 따르면 1917년 11월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 시대의 태극기 문양과 같아서 독립을 바라는 불교계의 서원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10년대 탱화 제작 등 모든 예술 행위가 일제에 의해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을 피하고자 지장시왕도가 제작된 이후에 작게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택술 배향사원 창동서원
창동서원은 후창 김택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며, 1965년 지역 유림들이 세워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온다. 서원 내부에는 위패를 모신 사우와 강당, 직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후창집의 사본과 석판본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들을 보관하고 있다. 김택술(1884-1954)의 자는 종현(鍾賢), 호는 후창(後滄)이며, 일제의 통치를 거부해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후학 교육에 힘쓴 유학자이다. 17세 때 천안 금곡에 있는 전우(田愚)를 찾아가 수학하여 후창이란 호를 받았다. 1906년 최익현(崔益絃)의 태인(泰仁) 창의(倡義)에 참가했으며, 송병선(宋秉璿)·김복한(金福漢)과도 사귀었다. 어머니가 죽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효로서 이름을 알렸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된 뒤로 망국의 한을 품어오던 중, 1915년 일제의 상사금(賞賜金)을 질척(叱斥: 꾸짖으며 물리침)했고, 또 큰 아들을 일본인의 학교에 입학시키라는 강요를 단호히 뿌리쳤다. 1930년경 단발령과 창씨개명령(創氏改名令)에 불응해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 항상 복수설욕의 일념으로 왜적을 타도할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不忘室)을 건립하였다. 1964년에 문인과 유림들이 공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