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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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진 현창비(개진면 양전리)
곽태진(1917-2006)은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서 아버지 곽종의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금선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2년 3월 성일영·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현풍신사(玄風神社)에 방화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령군·청도군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야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같은 날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946년 한국민주당 경북도당 청년부장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29일 서민호(徐珉濠), 엄상섭(嚴詳燮), 고영완(高永完) 등 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53년 민주당 발기인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민의원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81년∼1985년까지 민권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 독립운동가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4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곽태진 현창비(우곡면 답곡리)
곽태진(1917-2006)은 1917년 5월 18일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서 아버지 곽종의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금선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42년 3월 성일영·도종표(都鍾杓) 등 동지 100여 명을 규합하여 항일 비밀결사인 호의단(護義團)을 조직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현풍신사(玄風神社)에 방화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고령군·청도군 등의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 봉기를 계획하던 중, 1945년 5월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야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그러다가 같은 해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으며, 같은 날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출옥할 수 있었다. 광복 이후 정계에 입문하였으며 1946년 한국민주당 경북도당 청년부장을 지내고, 1950년 제2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3월 29일 서민호(徐珉濠), 엄상섭(嚴詳燮), 고영완(高永完) 등 동료 국회의원들과 함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였다. 1953년 민주당 발기인으로,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고령군 지역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면서 민의원 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981년∼1985년까지 민권당 부총재를 역임하였고,건국대학교 기성회 이사, 독립운동가연맹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6년 4월 1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김영득 기념비, 영화소개비
김유영(1908 - 1940)은 일제강점기 「유랑」, 「애련송」, 「수선화」 등의 작품에 관여한 영화인. 영화감독이다.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카프(KAPF)의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안종화(安鍾和)·이우(李愚)·이경손(李慶孫) 등이 1927년에 영화예술 연구를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카프파 영화인들을 끌어들였다.1928년에 신경향파(新傾向派) 계열의 최초의 영화이며 무산계급 농민의 저항을 그린 「유랑(流浪)」을 처음으로 감독하였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1929년에는 협회의 명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 하여 서울키노(혹은 서울영화공장)로 개칭하고 제2회 작품으로 무산계급 민중의 서러움과 투쟁을 그린 「혼가(昏街)」를 감독하였다.이 영화도 흥행에는 실패하였지만 무산계급영화의 제작을 전국적으로 파급시켰다. 그러나 지방에서의 프로영화 제작은 자본부족으로 거의가 제작 중에 중단되었다. 제3회 작품으로 「화륜(火輪)」(1931)을 감독해 내놓았으나 계급투쟁과 사상을 지나치게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무성영화시대에 무기로서의 영화운동을 펼쳤던 카프계열의 영화는 여기서 막을 내렸다. 1938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명우(李明雨)·김태진(金兌鎭)·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였다.1939년에는 최금동(崔琴桐)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愛戀頌)」의 감독을 맡아 재기하였고, 1940년에 「수선화」를 감독, 그 개봉을 앞두고 죽었다. 그는 프로영화운동을 펼친 영화감독으로서, 노골적으로 좌익으로 기울지는 않고 민족항일기에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상순 기념비, 송덕비, 공적비
남상순(1926-1978)의 호는 흑구이다. 남상순은 1941년 일본에서 충성회를 조직해 항일활동을 전개했다. 수시로 귀국하며 국내의 청소년층을 지도하고, 민중계몽에 힘쓰며 실력양성을 하던 중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에서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명균 유적지
이명균(1863 - 1923)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단장 · 재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0년 3월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긴밀히 호응하여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여 전후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다액의 군자금송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후원의용단의 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발병하여 예심도중인 이듬해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순국하였다. 구속될 당시 송금하지 못한 군자금 8만 3000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압류되었다. 한편, 3,000여 석의 자산도 군자금으로 봉압되었으며, 그 뒤 가산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1970년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봉률 행적비
김봉률(1897 - 1949)은 경남 합천(陜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합천 해인사(海印寺)를 비롯한 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와 문경 일대를 무대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해인사 부속 학림의 학생으로 재학하던 김봉률은 해인사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자 김봉률은 송복만(宋福晩)·최범술(崔凡述)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 위해, 대구 등지로부터 30,000여 장이나 되는 종이를 구입하는 한편, 해인사의 등사판과 학교 등사판을 몰래 가져다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또한, 이들은 해인사 만세운동에 이어 경남 각지로 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봉률 등 학생 대표 30여 명은 각기 지역별로 분담하여 3인씩 대(隊)를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각기 분담한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통영(統營)에서 집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김봉률은 강재호(姜在鎬)·기상섭(奇尙燮) 등과 함께 일대를 이루고, 경주·양산·통도사·범어사·동래·부산·김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런데 거창·안의·함양·산청·남원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이 일본헌병대와 일경에게 검거되면서 통영에서의 만세운동은 계획대로 실행할 수 없었다. 그 뒤 김봉률은 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김장윤 등 10여 명과 만주로 건너가 윤기섭(尹琦燮)·지청천(池靑天) 등이 운영하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독립군에 편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9월 경, 김봉률은 박달준(朴達俊)·김장윤(金章允)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이들은 경남 합천군(陜川郡) 가야면(加耶面)을 근거지로 삼고, 군정부(軍政府)의 인감과 영수증을 만든 후에, 경상도·충청도 일대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경, 문경(聞慶) 금룡사(金龍寺)로 잠입하였으나 주지의 밀고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명균 순국기념비
이명균(1863 - 1923)은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단장 · 재무총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0년 3월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긴밀히 호응하여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여 전후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다액의 군자금송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후원의용단의 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상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발병하여 예심도중인 이듬해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순국하였다. 구속될 당시 송금하지 못한 군자금 8만 3000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압류되었다. 한편, 3,000여 석의 자산도 군자금으로 봉압되었으며, 그 뒤 가산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1970년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열 집 표지석
박열(1902 - 1974)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천황과 황실요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초명은 박준식(朴準植) 또는 박혁(朴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김약수(金若水)·조봉암(曺奉岩)·서상일(徐相日) 등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黑濤)』·『불령선인(不逞鮮人)』·『현대사회』 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유림단 독립청원서 작성지(추원재)
사동 추원재는 충재 권벌(冲齋 權橃)의 손자인 권래(權來)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장자인 권상충(權尙忠)이 1621년에 처음 건립하고, 증손인 권두응(權斗應)이 증축하는 등 수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원재는 상실(上室)과 동루(東樓) 및 관리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누각 건물로 심벽[기둥사이에 기둥이 드러나게 만든 벽]없이 판벽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또한 이 건물은 독립운동사에서 독특한 자취를 가지고 있는데, 1919년 기미 「파리장서」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성재 권상익(省齋 權相翊)이 일부 유림들과 다시 외교활동에 나설 계획을 세우고, 중국의 유력한 인물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 위하여 1920년에 「제2차 장서」를 작성한 곳이다.
김홍기, 김정진 집
김홍기(1884 - 1954)는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 등을 중심으로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는 운동을 함에 각 지방 유림대표를 심방하여 서명 날인을 받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8월 김창숙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 내몽고(內蒙古)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의 군자금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에 이에 찬동하여 김창숙의 지령서를 김뇌식(金賚植)에게 전달하고 군자금 모금활동을 함께 하기로 하고 2천원을 기탁받았으며, 김뇌식과 동행하여 강필(姜必)을 방문해서 또한 2천원을 기탁받아 함께 4천원을 그와·김뇌식·강 필 3인이 동행하여 동래에 은신해 있는 김창숙에게 전달하였으며, 김창숙의 군자금 모금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이 일제에 발각되자 그도 역시 붙잡혀 수개월간 미결감에 수감되었다가 출감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진(1925 - 2013)은 경북 봉화(奉化) 사람이다.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3년 4월에 동교생 이상호(李相虎) 등이 주도하여 조직한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 결성된 태극단은 조국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전국적 조직을 통한 무력항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따라서 동단원들은 우선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힘을 쏟았다. 1943년 5월에는 그동안 가입한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이 비파산(琵琶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갖고, 구체적 투쟁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으며 최고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育成府) 아래 3국(局), 10여부(部)를 두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 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비서장 및 관방국 경제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단원들은 용두산(龍頭山)·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를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노력하였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그는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2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바래미마을 독립운동기념비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 명월루와 해관구택에서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유림단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선생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밭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三代)로 이어져 대구, 일본,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김뇌식 집
김뇌식(1877 - 1935)은 경상북도 봉화(奉化) 사람이다. 1925년 8월 김창숙(金昌淑)이 중국으로부터 비밀리에 입국하여(동년 8월 17일 서울에 도착) 내몽고(內蒙古) 지방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할 자금으로 20만원 모금을 목표로 활동할 때 이에 찬동하여 2천원의 거액을 모금하여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26년 3월 이 군자금 모금운동을 위하여 다시 태극단(太極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