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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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일, 손연준 집
손양원 목사의 부친이신 애국지사 손종일 선생이 손양원 목사를 낳으신 생가 옆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손양원(손연준)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연준 기념관
애국지사 손종일 선생과 아들 되시는 손연 목사를 기리고자 그의 출생지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손연준(이명 손양원, 1902-1950)은 해방 이후 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된 목사로 호는 산돌이며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손종일(1871-1945)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장로였으며 경남 함안군(咸安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2006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연준은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194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진규 추모비
조진규는 1904년 9월 15일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서 태어났다. 16세의 나이로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38세로 작고할 때까지 다양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읍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함안 경찰 주재소 및 함안 등기소 등에 돌을 던지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 후 동아일보사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함안 형평사 창립 임시 의장, 함안 소작인 조합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착취와 탄압을 막아 내고 주민 계도에 앞장섰다. 1924년 청년단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고, 1926년 6·10 만세 운동 때에는 예비 검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1927년 상해 독립단경남 대표로 선임되어 안재홍(安在鴻)과 대한 독립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석건, 조한휘(趙漢輝)와 함께 신간회 함안 지회를 결성하고 농민 조합도 만들어 항일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1931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당에 입당하고, 1935년 나진·웅기 등지에서 노동 쟁의를 주도하다 신징[新京]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귀국하였다. 옥살이와 울분이 병이 되어 1941년 8월 10일 38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백초월 출가 사찰(영원사)
백초월(1878 - 1944)의 이명은 백의수(白義洙)이다. 1919년 4월 승려의 신분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비밀단체를 경성중앙학림(京城中央學林) 내에 조직하고 그 단체의 단장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및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1919년 11월 25일 단군(檀君)의 건국기념일에 종로 삼청동(三淸洞)에 태극기와 단군기념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성립에 관한 축하문과 선언서 및 포고문 등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919년 12월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며, 1920년 2월 25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 의회에 독립청원을 하기 위하여 활동할 때 동경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중 붙잡혔다. 이후 1920년 4월 6일 승려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승려들을 규합하여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종로(鐘路)경찰서에 붙잡혔다. 1938년 봉천행(奉天行) 화물차에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낙서한 사건으로 연좌되어 붙잡혀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규환 사적비
정규환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모집 운동을 하다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규환은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1919년 11월 함양군을 무대로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전민족적으로 전개되는 상황에서 정규환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평소 뜻을 같이 하던, 고재경(高載景)·정재원(鄭在元)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들은 해외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함양군 수동면 내백리(內栢里)에 사는 부호 차우진(車佑鎭)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1919년 11월 15일 오전 1시 경 차우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결사대라 소개하고 운동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차우진은 가진 돈이 없다며 음력 10월 1일에 일금 10,000원을 제공할 것을 약정하였다. 그는 12월 12일 약정한 군자금을 수령하기 위해 약속장소로 갔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0년 1월 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3월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악화되어 가석방되었으나, 1921년 4월 16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기용 숭모비
노기용(1897~1975)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위하여,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21년 8월에는 경주군 양북면 최세림(崔世林)의 집에, 9월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3년 4월에는 합천군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11월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잡힘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듬해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자,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은 징역 5년형으로 감형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기용 묘
노기용(1897 - 1975)은 1919년 3·1운동 당시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위하여,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21년 8월에는 경주군 양북면 최세림(崔世林)의 집에, 9월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의 집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군자금 모금활동을 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3년 4월에는 합천군 초계면의 문재규(文載奎)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3년 11월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잡힘으로써 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23년 12월 2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듬해 4월 9일 예심이 종결되고 공판에 부쳐졌으나, 고문으로 인한 상처의 감정관계로 공판이 여러 번 연기되었다. 1924년 10월 16일 징역 10년을 구형받고, 11월 6일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소하자, 1925년 4월 21일 대구복심법원은 징역 5년형으로 감형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찬규 묘
변찬규(1906 - 1950)는 1932년 3월 경남 합천군 낙동농민조합(洛東農民組合) 초계지부(草溪支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초계지부 위원장으로 동년 5월 조합원들과 함께 국사봉에 올라 메이데이 기념식을 거행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3년 5월 1일 경동면 관평리 야학교 내에서 메이데이 기념식을 거행할 당시 "땔감의 자유로운 채취, 부역의 공평한 부과, 조선인의 일본내 자유로운 여행" 등을 요구하며 총독의 시정방침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 다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조 기적비
김영조(1906 - 1953)는 일제하 민족적 색채를 띤 종교가 널리 퍼지던 중, 삼신교(三神敎)라는 종교를 믿게 되었다. 삼신교는 충청남도 논산군 두마면에 사는 연정원(延鄭元)이 포교(布敎)한 것으로, 천(天)·지(地)·인(人)의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종파였다. 김영조는 1935년 초 삼신교를 믿게 되면서 이종철(李鍾喆) 등을 신도로 포교하였다. 그후에도 1943년 3월 중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 이모(李某)의 집에서 같은 군 창천동에 사는 송영상곤(松永相坤) 등에게 삼신교의 종지를 설파하였다. 또한 김영조는 1943년 4월 초경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동 감혜사(感惠寺)의 승려 등 3명에게도 일제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사정을 말하고, 일제의 군대가 태평양과 동남아지역에서 패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김영조는 삼신교를 믿으면 민족독립을 달성할 수 있고 일제가 침략전쟁을 감행하였으나 동남아 각지에서 패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다. 이에 일제는 김영조를 ‘유언비어’를 날조하였다고 하여 검거하였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상소, 1944년 1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김영조는 대구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6월 21일 출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1944년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방보에서 안창률, 김명돌, 성상용, 송수답 등 29인이 모여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신축 중에 있는 남산 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7월25일 밤 축장으로 전원 무장하고 대왕산에 집결하여 26일 아침 안병률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7월 26일 무장한 일경 30명을 돌과 죽창으로 맞서 물리쳤고 8월 5일에도 일경 30명을 격퇴하였으나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나 8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전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안창률, 김경화 선생은 옥중 순국하였다.
항일운동기념탑
일본의 36년간 억압과 식민지 생활에서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야 2021년 5월 건립하였다.
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전적지비
일제가 우리 고유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고 최후의 발악적인 식민지 정책기 자행되던 1944년 6월 민족의 차별과 일제 압정을 성토하고 징병, 징용을 거부하며 조국독립운도을 위해 일제에 항거키로 결의했다. 본 항일운동은 남산면 거주 안창률등 29명의 청년들이 대왕산에서 1944년 7월 25일 부터 8월 13일까지 20여일이상 죽창으로 일제의 총칼및 비행기에 대항하면서 대왕산정상에 돌로 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와 특공대, 정보연락대등 결심대를 편성하여 3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는 중 식량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전원이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50여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구 형무소로 수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위반, 치안유지특별법위반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하 지사는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