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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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봉 묘
안용봉(1912 - 1957)의 이명으로는 김상수(金尙洙, 金相洙), 김성수(金性洙), 김학주(金學周), 김학동(金學童), 김학수(金學壽), 김수개(金壽介), 안승현(安承賢), 김명산(金命山), 김달문(金達文), 김종수(金鍾洙)가 있다. 안용봉은 1930년대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적색노동조합과 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사상에 입각한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전개하였다.안용봉은 1933년 6월경, 서울 계동에서 안승락(安承樂)으로부터 「자본주의의 음모」, 「제2빈핍물어」 등을 교재로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 및 실천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1934년 3월경, 서울 영등포에서 김희성(金熙星)을 만나 신사상을 교육하였다. 1935년 1월경, 김희성의 소개로 정재봉(鄭載鳳)과 만나 수차례 모임을 갖고 국제정세에 대한 검토, 자본주의국가 대 소비에트전쟁을 준비하는 적색노동조합 등의 실행에 관한 협의를 하였고, 7월에 당시 제사공장 직공이던 김희성과 모든 직공을 궐기시켜 동맹파업을 실행하였다. 8월 중순경 검거를 피해 창원·부산 지역을 전전하였다. 이후 안용봉은 1941년 3월경 체포될 때까지 9년여 동안 활동을 계속하였다. 안용봉은 1941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 30일 통산)을 받아 17개월을 복역하고 1942년 10월 30일 출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진훈 묘
김진훈(1924 - 1945)는 동래중학교 재학중 1940년에 양중모(梁仲模)·남기명(南基明)·김일규(金一圭) 등과 함께 은사 허 현(許鉉)의 지도를 받아 독서회를 조직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1941년 겨울에는 그의 집에서 독서회원들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서약하고, 독서회를 강화하여 조선독립당으로 개편하였다. 1942년 이들은 남기명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양중모의 집에 다시 모여 군사기밀 탐지·일군 탄약고 폭파·군용열차 통과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계획등을 세웠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려 했다.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다. 그는 붙잡힌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경의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45년 6월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경남항일독립운동기념탑
경남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경남 출신 독립운동가 및 유공자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공원 가운데 기념탑에 건국훈장 수훈자들의 이름을 유리에 써 놓았다.3.1 만세운동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임시정부, 의열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애국지사와 유공자를 기념하기 위해 2004년 3월 1일 삼일절에 건립되었다. 조성 당시 국사편찬위원장이었던 이만열 박사가 경남항일운동 약사를 썼으며, 경남도의 지원으로 탑이 세워졌다.
김철호 공적비
김철호 선생은 경남 통영 사람이다. 중국 광동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원봉·오성륜의 권유로 1926년 8월 의열단에 가입하여 선전출판부의 책임을 맡았다. 이 무렵 의열단은 근거지를 상해에서 광동지역으로 옮겨 유오한국혁명동지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민족전선의 통일운동에 앞장서 나갔는데, 그는 동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국내활동의 임무를 부여받아 귀국한 그는 1927년 신간회가 결성되고 전국 각처에 신간회 지회가 설립될 때, 통영지회에 가입하여 총무간사와 서무부의 일을 맡았다. 이 같이 그는 신간회 통영지회를 중심으로 표면활동을 벌이는 한편 비밀리에 동지를 포섭하면서 의열투쟁의 계획을 추진해 갔다. 그러던 중 1928년 6월 중국에서 의열단 중앙집행위원 서응호가 귀국하자 마침 열리게 될 박람회를 기회로 삼아 일대 거사를 계획하다가 1929년 10월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1929년 12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지리산 항일투사 기념탑
지리산항일투사기념탑은 하동군 악양면 정동리 651-1 취간림에 위치한다. 이 기념탑은 1905년부터 1915년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항일 의병 및 독립투사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건립은 지리산 항일독립투쟁 기념사업회가 주체가 되고 악양면 청년회가 주관하였다. 자금 후원은 국가보훈처와 경남도, 하동군, 지리산 인근 20여 개의 단체들과 국민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2008년 건립됐다.
항일독립운동기적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173-5 양보공원 내 양보면 출신 항일독립운동 기적비가 건립되었다. 하동군 양보면 출신 독립 유공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으며, 이들의 공적을 기록하였다.
항일투사추모탑
하동군 옥종면 항일투사추모탑은 제70주년 광복절을 맞아 항일투사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독립유공자와 유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2015년 8월 15일 건립되었다. 옥종 뿐 아니라 진주, 산청, 옥종, 청암 일대에서 활동한 인물을 모두 추모하고 있다. 약 1억여원(군비 7000만원,자비 3000만원)을 들여 준공하였으며, 높이 10m로 광복의 횃불을 든 형상이며, 추모탑과 함께 별도로 마련된 명단석에는 옥종면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투사 158인의 추모의 글을 새겼다. 이 곳에 새겨진 인물의 이름은 아래와 같다. 항일의병대인 경남창의대의 중군장 양문칠, 후군장 류명국, 그리고 손기혁, 김내순, 김용이, 권석도, 손마생, 송치도, 신석원, 양자익, 이겸로, 이만영, 이백인, 이상수, 임봉구, 장석현, 장세경, 조인환, 추교문, 황의중, 권태형, 이도윤, 이수호, 정남시, 주무준, 조정래, 조학제, 하일로, 화진선, 권대섭, 권복태, 권상숙, 김중수, 정화영, 조성래, 조양래, 최인우, 하계원, 하성백, 하형수 등
하동항일독립기념탑
이 곳은 국가보훈부 지정 국가현충시설로, 하동 지역의 독립운동 유공자를 기리기 위하여 2014년 삼일절에 준공되었다. 하동항일청년회관, 하동 항일독립운동 약사, 대한독립선언서 비,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탑 등의 조형물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건립 취지문, 헌시, 하동지역 독립유공 서훈자 명단 등을 기록한 비들이 서 있다.
김성용 기적비(충혼각)
1919년 3월 경남 함안군(咸安郡) 함안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성용 의사의 기적비이다. 함안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가했다가 귀향한 조한휘(趙漢輝)ㆍ한종순(韓鍾淳)ㆍ이찬영(李讚榮)ㆍ조병흠(趙丙欽)ㆍ박건병(朴建秉)ㆍ강기수(姜琪秀)ㆍ한관렬(韓灌烈) 등이 이끌었다. 이들은 대산면(代山面)의 한학 훈장인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여 3월 19일 함안 읍내 장날을 만세일로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한편, 이 계획을 각지에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김성용도 3월 19일에 함안시장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큰 깃발을 치켜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함안경찰관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경찰들이 이를 저지하며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격노한 군중은 6회에 걸쳐 도끼, 몽둥이, 돌을 들고 주재소에 들어가 공문서와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어 순사부장과 함안군청, 부산지방법원 함안출장소, 함안공립보통학교, 우체국, 일본인 소학교를 공격하였다. 김성용도 함안경찰관주재소 등에 돌을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騷擾罪)로 징역 1년을 받았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함안조씨 13충 독립유공자 공적비
함안 조씨 문중에서는 총 90여 명의 독립 유공자가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기에는 순의한 7명을 포함 13명의 충신이 구국 투쟁에 나섰다.이 비석들은 독립운동과 항일 투쟁에 몸담았던 함안 조씨 문중의 여러 의사들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비석 뒷면에는 독립운동가 박시창 선생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의 양손자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양기탁 선생의 손녀사위로 국가보훈처장 및 독립기념관장을 지낸 박유철 광복회 회장이 헌사를 썼다.
조용원 묘
조용원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읍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배 차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함양으로 돌아온 조한휘(趙漢輝)·이찬영(李讚榮) 등은 대산면(大山面) 한문교사 안지호(安知鎬)와 함께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거사 당일인 3월 19일 정오경, 주도자들은 봉성동(鳳城洞)에 모인 수백여 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오후 2시, 조용원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마산(馬山)경찰서 일경들이 무력을 행사하자, 이에 격노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주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들이 응하지 않자 구타하기도 하였다.이어 조용원은 시위군중들과 함께 폐쇄해 놓은 군청문을 부수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하며 구타하였다. 그리고 사기가 충천한 시위군중은 등기소·우체국·일본인 소학교를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조한국(趙漢國)·강상중(姜相中) 등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을 사전에 차단시키기 위해 전화선을 끊었다. 그러나 5시 40분경, 전화가 불통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마산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긴급출동하였다. 이들은 현지 일경과 합세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주도자를 검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8월 15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법수항일운동기념비
주민 200여 명이 면수면사무소에 모여 학교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는데 이전에 호의적이던 면장도 직책상 이전을 찬성하였고 이에 민중들은 면장을 납치하여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날 시위에서 의령읍까지 진출하는 도중에 일경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위군중은 강제 해산되고 시위를 주동한 지사 29명은 체포되어 함안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되었다. 특히 이 중 17명의 지사는 11월 21일 부산법원에서 공무집행방해, 상해죄로 6개월부터 1년 6개월 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날의 항일운동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5년 이 기념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