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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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익 공적비
김용익(1886~1970)은 1921년 9월경 경남 산청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용익은 진주 3·1운동 때 홍종석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 도주하여 산속에서 은신하였다. 이때 권총을 입수하였고,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의하고 동지들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에 나섰다. 동년 9월 20일 오후 5시경 동군(同郡) 단성면(丹城面) 소남리(召南里) 조현용(趙顯溶)의 집에 들어가 그에게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이라 칭하고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 동월 23일 오후 5시경 동군 도산면(都山面) 장죽리(長竹里) 이원규(李源奎)의 집에 가서 같은 방법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동월 28일 오후 6시경 동군 생비량면(生比良面) 가종리(可淙里)에 나타나 동면 주재소 순사 정안찬(鄭安贊)을 응징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김용익은 일경에 체포되어 1932년 3월 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6년을 받았으나, 곧 징역 4년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덕곡서당(하겸진 사당)
덕곡서당은 회봉 하겸진선생이 문도들을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선생께서는 처음 구강정사龜岡精舍라는 곳에 있었지만 정사가 너무 좁아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다. 제생들이 이를 염려하여 선생의 맏아들 영윤과 더불어 의견을 모아 이곳에 이건하였다고 한다. 선생이 들어와 거처하며 지명에 따라 덕곡서당이라 이름 하였고. 서당의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휘호이다. 1957년부터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의 덕곡서당(德谷書堂)에서 매년 하겸진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덕곡서당 우측으로는 하겸진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다. 하겸진(1860 - 1946)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이후 1926년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과 군사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그는 김창숙의 활동을 지원하던 중 1927년 2월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파리장서비(덕곡마을)
파리장서비는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 덕곡마을 덕곡서당 앞에 위치해 있다. 파리장서운동은 1919년 5월 산청 출신의 면우 곽종석(1864∼1919) 등 137명의 전국 유림 대표가 장문의 독립청원서를 프랑스 파리강화 회의에 보낸 독립운동이다. 파리장서비는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하며 서명한 유림의 이름을 새긴 비를 말한다. 진주에서는 수곡의 회봉 하겸진, 백촌 하봉수, 대곡의 매당 이수안 등이 참여했다. 수곡 출신의 하겸진은 파리장서운동을 최일선에서 이끈 산청 곽종석의 제자였다. 하겸진은 함께 수학한 하봉수 등과 수곡 낙수암에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하겸진 집
하겸진(1860~1946)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이후 1926년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과 군사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김창숙의 활동을 지원하던 중 1927년 2월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겸진 묘
하겸진(1860~1946)은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서명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많은 유림들이 일제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이후 1926년 김창숙이 독립군기지 건설과 군사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운동을 전개할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김창숙의 활동을 지원하던 중 1927년 2월 이 일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마산형무소 표지석
마산형무소는 1909년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출발하여 일제 때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이곳에서 옥살이를 하다 순국했다. 투옥된 사람들은 농민, 노동자, 학생,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있었다. 경상남도 지역의 3·1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마산 감옥에 투옥되었다. 이외에 마산 감옥에 투옥된 사람들과 관련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마산에서 발생한 청산리 전투 승전보 배포 사건, 밀양 경찰서 폭탄 투하 사건, 동양 제사 주식회사 진해 공장 노동자 쟁의 사건, 반일 문학 그룹 독서회 사건, 교사들의 신사 참배 반대 사건 등이었다. 이외에도 노동·농민 운동, 조직 운동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마산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기도 했다.
마산헌병분견소
마산헌병분견소는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남동에 있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마산 지역 독립 운동가들이 잡혀와 고초를 겪었던 근대사의 질곡을 보여 주는 역사의 현장으로 일제의 탄압과 무단 통치를 상징한다. 마산헌병분견소는 김해·웅천·진해·진동·배둔·장목 등 7개 분견소를 관할하면서 마산 뿐만 아니라 경남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많은 애국지사들을 탄압하던 곳으로, 3·1운동 당시에는 시위 진압을 위해 삼천포 지역까지 헌병이 파견되었다. 구 마산헌병 분견대는 옛 일본군 헌병 분견대 건물로, 일제 강점기 중반인 1926년에 붉은 벽돌로 지었다. 일본 군대의 마산 진출은 1905년 5월 마산선(馬山線) 철도가 건설될 때 시작되었다. 1909년 12월에 대구 주둔 일본군 헌병 분견소가 신마산에 설립되었고, 3·1 운동 후인 1920년에 이르러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어 경찰이 치안을 맡도록 했다. 해방 후 군 정보기관 건물로 사용되던 헌병분견소 건물은 충호회 경남지부에서 사용하다가 2005년 등록문화제 제198호로 지정된 이후 현재까지 비어 있는 상태다.
명도석 집
명도석(1885~1954)는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에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명도석 묘
명도석(1885 - 1954)는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에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연준 순교기념비
손연준(1902~1950)은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형철 묘
지전 김형철 선생(1891~1965)은 1891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에서 태어나 일본 오카야마(岡山)의전을 졸업하고, 1918년 10월 자신의 집 근처(현 한국투자증권 마산지점)에 최초의 경남 한국인 병원인 마산삼성병원을 개원하였다. 이 병원은 개원 4개월만인 1919년 3월 20일 함안 군복 독립운동과 4월 3일 마산삼진연합 독립운동 당시에 부상당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무상으로 치료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삼성병원은 개원 후 1919년 3·1운동 당시 부상자 치료에 정성을 다한 김형철 선생의 애국정신이 배어 있던 곳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20일 함안군북독립운동과 4월 3일 마산삼진연합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의해 다친 수많은 부상자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병원 지하실 등에서 무상으로 치료해 주었다. 또 병원을 찾지 못하는 부상자는 왕진 가방을 들고 찾아가 직접 치료하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일본 경찰은 김 선생을 경찰서에 연금하기도 했다. 김 선생이 1965년 1월 세상을 뜨자 마산시의사회 등이 1965년 8월 15일 현 마산대학교 교정 한쪽에 선생의 기념비를 세웠다. 삼성병원은 1957년 3월 15일 폐업했다.김형철 선생은 일제의 지배정책에 반대해 결성된 신간회의 활동을 도운 것으로도 알려졌다. 김형철 선생의 이러한 항일운동은 김녕김씨 종친회가 그의 독립유공자 지정을 위해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명도석 기념비
명도석(1885~1954)는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였다. 또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지회창립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로 선출되고,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으며,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