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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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경남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960-21 근린공원 양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양산에서의 항일 활동 및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2009년 1월 세워졌으며,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항일 공신 및 일제 침략기의 의병장 활동, 3.1 만세운동, 동경 2.8 만세운동부터임시정부, 국내투쟁, 농민운동 및 민족 의식 함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정진영 묘
정진영 선생은 경남 양산 사람이다. 1932년 3월 16일 경남 양산군 양산농민조합원의 구금에 항의하여 조합원들과 함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 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등 3백여 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 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정진영을 비롯한 170여 명의 조합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안효제 집
안효제(1850~1916) 선생은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당시 참판(參判)이었던 최익현(崔益鉉)과 만나 국권회복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입산(入山)하였으나, 동년 11월 일제는 이른바 은사금을 주어 그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대한의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고 거부하여 창령(昌寧)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2년 아우 안창제(安昌濟)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호종 호국신전(세덕사)
박호종(1905~1940) 선생은 경남 진양(晋陽) 사람이다. 진주제일보통학교(晋州第一普通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26년 경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경,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야학회를 설립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며 안으로는 식민지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진주지역에서는 송기호(宋畿鎬)·조삼수(趙三壽)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공산주의자 진주지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농민위원회 . 노동위원회 . 학생위원회 등이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박호종은 농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금산면(琴山面)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박호종은 비밀결사 조직을 위해 금산면에서 농민을 규합한 후, 진주읍내 남강(南江)에서 회합을 가졌다. 또 같은 해 11월 그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인쇄소에서 항일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붙잡혀 7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효제 행적비
안효제(1850~1916)는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1895년 8월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상경하여 당시 참판(參判)이었던 최익현(崔益鉉)과 만나 국권회복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입산(入山)하였다. 동년 11월 일제는 이른바 은사금을 주어 그를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대한의 신하로서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죽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고 하고 거부하여 창령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2년 아우 안창제(安昌濟)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병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병우 추모비
남병우(1859 - 1926)은 일제가 식민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 중교동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농촌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局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전중진(田中鎭), 남병우, 남상순(南相舜), 이진우(李震雨) 등의 지역 유지들은 토지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아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하여 동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고, 이를 안내하던 박기양(朴璂陽)을 구타 응징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남병우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5년 2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상순 추모비
남상순(1878~1949)는 일제가 식민지배체제의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고 한국인의 토지를 수탈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항거하여 투쟁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경남 의령군의 경우 정곡면(正谷面) 중교동(中橋洞)의 동쪽 일대의 토지는 주민들이 개간을 끝내고 지세(地稅)를 납부하며 경작해오던 민유지(民有地)였다. 그러나 일제는 관행을 무시한 채 이 지역을 인근의 토지와 함께 국유지로 편입하여 조선농업주식회사에 불하하였고 1914년 8월에는 임시토지조사국원(臨時土地調査局員)을 파견하여 해당지역의 측량을 강행하였다. 당시 정곡면장으로 재직 중이던 남상순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자 전중진(田中鎭)·남병우(南炳祐)·이진우(李震雨) 등의 지역 유지들과 함께 토지측량이 실시되면 모두 국유지로 편입되어 조선농업주식회사의 관할로 이관되고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할 것이 명백하므로 토지측량을 극력 저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하여 700여 명의 주민을 집결하여 해당 토지측량은 동민의 권리를 무시한 압제의 작업이니 단연코 방해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한 후 8월 26, 27일의 이틀에 걸쳐 경찰관의 입석하에 진행된 임시토지조사국원의 토지측량을 방해하였다. 박기양(朴璂陽)은 구타 응징당하기도 하였다. 남상순은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1914년 10월 1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태식 묘
이태식(1875~1952)은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경남 거창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뒤 그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만주·내몽고(內夢古)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김화식(金華植)과 송영호(宋永祜)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柳友瑾)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태식 사당 (임천정)
이태식(1875~1952)은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장서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19년 경남 거창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하이로 갔다. 이때 그는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김복한·김창숙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그 뒤 그는 만주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려던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가담하였다. 2차유림단 사건은 김창숙(金昌淑)이 1925년 3월부터 7월까지 3개월간 동지 송영호(宋永祜)·김화식(金華植)·이봉로(李鳳魯) 등과 만주·내몽고(內夢古) 일대에 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무장독립운동세력 양성을 위해 군자금 모금 실행방안을 강구하려던 것이었다. 1926년 1월 상순 김창숙은 김화식(金華植)과 송영호(宋永祜)를 각지로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나 모금 총액이 12,400원에 불과해 예정액에 크게 미달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제2차 계획을 세워 4월 11일 상해에 도착, 의열단의 유우근(柳友瑾) 등과 상의하여 의열단원을 동원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영남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관련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 약 6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구금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태식은 제2차 유림단사건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진주항일투사추모비
진주항일투사추모비는 진주, 진양 출신 항일투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진주지회에서 2002년에 세운 비이다. 매년 신년, 3.1절, 광복절에 후손들과 사회단체, 청년 학생들이 애국선열에 대한 공훈을 기리며 우리고장 출신 항일독립투사들의 애국, 애족, 애향정신과 자주 독립의 의지를 되새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건립되었다.
박호종 추모비
박호종(1905~1940)은 진주제일보통학교(晋州第一普通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1926년 경에는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30년 경,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야학회를 설립하고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며 안으로는 식민지 통치체제를 더욱 강화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농민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9월 진주지역에서는 송기호(宋畿鎬)·조삼수(趙三壽) 등이 주동이 되어 조선공산주의자 진주지방협의회가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농민위원회 . 노동위원회 . 학생위원회 등이 비밀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박호종은 농민위원회에 가입하였으며, 금산면(琴山面)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박호종은 비밀결사 조직을 위해 금산면에서 농민을 규합한 후, 진주읍내 남강(南江)에서 회합을 가졌다. 또 같은 해 11월 그가 사재를 털어 설립한 인쇄소에서 항일 격문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붙잡혀 7월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하장환 기념비
하장환(1874~1928)은 1926년 1월 김창숙(金昌淑)과 함께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북경(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이 귀국했던 목적은,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아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때 필요한 군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하장환은 곽종석의 문집(文集) 출판을 위해 서울에 머물러 있던 중 김창숙을 만나 그와 같은 임무를 맡았다. 그리하여 경남 일대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군자금 모집활동 중 하장환은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이 기념비는 일암 하장환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11월에 건립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