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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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표 집
전홍표(1869-1929)는 경상남도 밀양 사람이다. 한말(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부터 밀양의 동화학교(東化學校), 개창학교(開昌學校), 밀흥야학교(密興夜學校) 등 다수의 사립학교 설립에 기부금을 내고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일제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에도 동화중학교 교장으로서 1914년 3월 강제 폐교될 때까지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펼쳤다. 그 덕분에 동화중학교에서는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윤세주, 김상윤, 한봉근, 최수봉 등 다수의 항일 독립운동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1921년 7월 13일 밤, 밀양군 밀양면(密陽面) 청년회관에서 한인수, 하경용 등 수십 명과 모여, 같은 날 사형집행을 당한 동화학교 제자 최수봉을 위한 부의금 모집을 발의하였다. 이후 한인수 외 3명이 모집위원이 되어 부의금을 모집하여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 또한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 회원 30여 명과 함께 최수봉의 유해를 인수받아 밀양청년회 주최로 ‘사체환영회(死體歡迎會)’를 개최하고 최수봉의 고향인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 안치하고 장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에서 벌금 100원에 처해졌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는데, 1922년 1월 21일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이른바 ‘1920년 부령(府令) 제160호 및 기부금모집단속규칙(寄附金募集取締規則) 위반’으로 징역 10개월(미결구류 90일 형기산입)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3월 9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인수, 강덕수 집
강인수(1900-199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느끼고 1924년 10월에 중국군 간부 양성 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 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중국군 장교로서 교관(敎官), 중국군 배련영장(排連營長) 부단장 주임(副團長主任)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하였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 및 조선민족혁명당 특파원 등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광복 후에는 임시정부가 환국을 결정함에 따라 일본군 내의 한적 사병 접수 업무 및 광복군의 확군 문제와 일본군 무장해제의 협조, 그리고 한국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한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간의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의 명령으로 광복군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하는 동시에 일본군 내 한적 사병을 접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 잠정적으로 편성된 지대라는 뜻으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올 일본군 출신 조선 병사들을 잠정적으로 수용하는 부대)를 주요 도시에 설치하게 되었다. 한적 사병의 인원을 약 10만 명으로 보고 기설 3개 지대 외에 7개 잠편지대를 증설하여 도합 10개 지대로 확장하며 각 지대는 완전한 사단 편제로 조직한다는 계획이었다. 따라서 잠편지대는 1945년 10월 중순부터 10월 말까지 전방에서 각각 조직되었다. 이때 그는 광동(廣東)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인 최덕신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51년에는 중국군 육군 소장에 승진되어 계속 복무하다가 1965년에 퇴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덕수(1904-1938)는 1919년 당시 그는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15세의 소년이었다. 그는 동교 졸업생인 윤차암, 윤수선, 김성선, 박소수 등과 함께 4월 2일에 영남루(嶺南樓) 뒷산으로 놀러 갔다가,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한 윤수선으로부터 부산에서는 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고창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그는 친구들에게 밀양에서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였고, 친구들도 그의 발의에 동의하여 그들은 2일 밤 밀양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을 규합하여 만세 시위를 실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동교 졸업생인 정선호의 집에 들러 그에게도 만세 시위의 실행 계획을 말하고 동의를 얻어 총 6인이 함께 주도하기로 하였다. 4월 2일 저녁 식사 후 그와 동지들은 생도들에게 학교 교정으로 모일 것을 권유하였다. 20~30명의 생도들이 모이자, 그들은 생도들을 학교 화장실 부근에 대기시켰다가 대오를 이루어 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생도들의 선두에 섰고, 그와 동지들도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학교 서쪽 무안가도(武安街道)를 행진하고 우측으로 돌아 북문(北門)까지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 시위로 강덕수는 일경에 체포되어 1개월여의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5월 5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4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이다.해천 지역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 항거하고 독립을 소망한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스토리텔링화하여 해천 항일운동테마거리를 조성하였다. 특히 밀양 출신 김원봉, 윤세주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3.13 만세운동과 밀양인의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을 벽화와 조형물 등으로 제작하여 그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계승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김홍규 공적 안내판
김홍규(1889-1951)는 대종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신민부(新民府, 북만주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독립운동 단체)와 연락하며 군자금을 모집 및 제공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1910년대에 윤창선, 손봉현, 손호, 윤치백 등과 함께 대종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는 한편, 별도로 해원교(解怨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였다.1927년 음력 9월, 대구에서 윤홍선, 손양윤, 신현규, 이병묵 등과 회합을 갖고, 지방의 부호 자제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모의하였다. 특히 김좌진의 신민부에 군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밀양군 단장면 사연리의 부호 김태진(金泰鎭)에게서 2차례에 걸쳐 3,000원을 모금하였다. 이때, 해원교의 교주를 만나볼 수 있다는 핑계로 김태진의 아들 김병연을 서울로 데리고 나온 뒤, 윤창선이 김병연의 명의로 3,000원의 약속어음(군자금 공채)을 만들고, 손봉현이 그의 도장을 위조하는 등의 작업을 하고, 이후 김홍규가 김태진에게 군자금의 지급을 요청하였다. 1928년 8월, 김홍규를 포함한 손봉현, 윤창선, 손양윤, 이병묵, 손호, 신현규 등 총 7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김홍규는 1929년 7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가증권 사문서위조, 사기, 제령 7호 위반, 강도, 상해죄 등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규 집
김명규(1893-1977)는 경남 밀양의 학생이었다. 1912년 밀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4월 17일 동래고보(東萊高普)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여 동래고보 전 학생이 모여 시위행진을 하던 중 붙잡혀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형, 집행유예 3년 형을 받았다. 1920년 12월 28일에는 서울에서 동지 황상규의 밀명을 받고 길림무관학교(吉林武官學校) 설립기금의 조달을 위하여 신의주(新義州)에서 파견된 동지 김노봉과 함께 창녕(昌寧)의 부호 하경석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3천 원을 요구하여 150원을 모금한 뒤 서울의 동지 황상규에게 전달하던 도중 붙잡혀 부산지방법원에서 7년 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7년에는 창녕(昌寧) 유림지서(儒林支署) 갑비(甲斐) 부장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10여 년간 도피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만당 근거지(다솔사)
경상남도 사천 봉명산 자락 아래에 다솔사가 위치하고 있다. 다솔사는 511년(신라 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영악사(靈嶽寺)로 창건하여,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시 다솔사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1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며 일제강점기에 한용운이 수도하던 곳으로 항일기지의 역할을 했다. 또한 소설가 김동리가 한동안 머물며 <등신불>을 집필하기도 하였으며 1960년대 다솔사의 주지였던 효당 최범술은 다솔사 야산에서 차밭을 직접 가꾸고 차를 직접 만들어 세상에 알렸다. 만당(卐堂)은 불교계 청년들이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 만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용운, 김법린, 최범술 등은 다솔사를 기점으로 교육활동 또한 활발하게 펼쳤다.
사천 항일운동 기념탑
경상남도 사천에 위치한 사천 항일운동 기념탑이다. 본 탑은 일제의 침탈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한 사천인들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사적이다. 사천에서는 독립을 위한 여러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고, 유림들은 충효를 바탕으로, 다솔사에서는 만당이라는 항일 비밀결사 모임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천도교 등 종교단체에서는 만방에 우리의 자주성을 알렸다. 사천인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고 널리 알리고자 이은식이 글을 짓고, 윤영미가 글을 쓰고, 사천시장 박동식이 본 탑을 세웠다.
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파리장서비)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기억의 방 2017 유림의 숲이다.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의 사적명은 한국유림파리장서비였고,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4-5 남사예담촌 광장에 위치하고 있었다. 본 사적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배포한 유림들의 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한 것이다.
유림독립기념관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유림독립기념관이다. 본 기념관은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배포한 유림들의 독립 의지를 기리기 위한 사적이다.
산청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
경상남도 산청에 위치한 산청항일독립유공자 추모비이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때를 같이 하여 산청, 단성, 신등, 신안 등지에서도 3월 21일 도내 장날에 수천 군중이 거사하였다. 본 비는 그때 순국한 선열을 비롯하여 항일 독립투쟁에 옥고를 치른 수많은 애국지사와 무명의 순국선열을 기리고자 1995년 건립되었다.
양산 충렬사
양산 충렬사는 양산시 교동 157-11에 위치하며, 양산의 삼조의열을 비롯 임진왜란 공신 및 항일 독립유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건립되었다 훼손된 것을 2012년 재건립하였다.충렬사는 양산 정신의 근간인 삼조의열 3위를 비롯해 임란공신 28위, 항일독립운동유공자 39위의 충혼을 모신 곳으로 조선시대에 건립됐다 훼철된 것을 2012년 장소를 달리하고 규모를 키워 새롭게 건립하였다. 옛 충렬사는 임란공신 조영규(趙英圭) 공과 백수회(白受繪) 공을 향사하고자 1696년(숙종 22) 양산 읍성 내의 동헌 남쪽에 건립됐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등의 철폐령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 삼조의열은 신라 때 삽량주간이었던 만고 충신 박제상(朴堤上) 공, 고려 때 양주방어사였던 김원현(金元鉉) 공, 조선 임진왜란 때 양산 군수 조영규(趙英圭) 공을 일컫는다. 이들의 비석이 양산 읍성 내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 피란 신세를 겪었고, 광복 후 지역 원로들이 조성한 춘추원 장충단(奬忠壇)에 모셔져 오다 이 곳 새 충렬사 내로 옮겨졌다. 또한 임란공신과 항일독립유공자들도 이 곳에 함께 모시게 됨으로써 흩어진 양산 선각자들의 혼령을 한 곳에서 모시고 길이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
김외득 행적비
김외득 선생은 경남 양산 출신이다. 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에 재학 중이던 그는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하여 1930년 3월 만세시위운동을 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학교를 퇴학당한 후 귀향하여 1931년 4월에 조직된 양산농민조합(梁山農民組合)에 가입, 소년부원(少年部員)으로 활동하였다. 양산농민조합은 1932년 2월 20일 양산사회단체회관에서 제3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첫째, 소작권 영구확립, 둘째, 지세공과금(地稅公課金)의 지주부담, 셋째, 소작료 4할납부 등을 결의하였으나 일경은 신영업(申榮業)을 비롯한 16명의 조합간부들을 체포하였다. 그는 김장호(金章浩)와 함께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구출할 것을 결의하고 최학윤(崔學潤)·최해금(崔海金)·최달수(崔達守)·김태근(金泰根) 등 3백여명의 조합원들을 주도하여 동년 3월 16일 양산경찰서에서 조합간부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운동을 폈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인하여 조합원 윤복이(尹福伊)가 순국하였다. 일단 양산협동조합 사무소로 피신한 조합원들은 다시 피체된 조합간부들을 호송하는 도중 구출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경의 급습을 받아 그를 비롯한 170여 명의 조합원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32년 10월 13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