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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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홍덕유 묘
홍덕유(1887 ~ 1947)는 1916년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후, 1919년 국내로 돌아와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준비위원, 신사상연구회,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 화요회 등에 참여했다. 또한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및 위원을 역임하고, 상하이에서 국내로 공산주의운동 지원금 및 항일격문을 들여오는 것뿐만 아니라 6.10만세운동 준비에 관여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이 발각돼 촉발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석방되었으며, 출옥한 이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 참가 등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스코필드 동상
스코필드(1889 - 1970)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며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전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와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으며, 3·1운동 이후에 일본의 조선인 학살과 고문을 국제 사회에 고발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제암리 학살 사건과 3.1운동 등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화성시에서 동상을 건립했다. 1959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보육원 후원과 흥국 직업학교를 돕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해 대한민국 문화훈장·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신용기 항일구국활동 기념비 92
신용기(1901-1948), 이명은 신철(辛鐵)이다. 1922년 노령 이르쿠츠크에서 조선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위하여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이듬해 12월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울로 들어와 1924년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 1926년 북풍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8월 경남 마산의 사각동맹 회원들에게 신사상을 전파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28년 체포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38년에는 의사면허를 얻었고, 해방 후에는 잡지사를 경영했으며, 1945년 조선인민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정치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환수 기념비
서환수(1888-1940)는 1930년 8월 28일, 유쾌동(柳快東)과 함께 대구 남성정(南城町) 중외일보 대구지국 앞에서 29일이 경술국치일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독립사상을 고취하기로 하고,유쾌동이 격문작성을, 서환수는 게시하는 일을 맡기로 하였다. 서환수는 29일 새벽 3시경부터 5시경까지 봉산정(鳳山町) 암정서적점(岩井書籍店)·백종기(白鍾基) 집·덕산정 야원질옥(野原質屋)·남성정 대구양기소(大邱洋譏所)·대화정(大和町) 곡물시장·원정(元町) 삼원재목점(杉原材木店)·달성공원 등 8곳의 전봇대에 격문 1매씩을 각각 부착하였다. 이로 인해 서환수는 붙잡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재성 유적비
정재성(1863-1941)의 자는 취오리고 호는 구재와 동리(東里)이며, 일명은 정환규, 정환성이다. 정재성은 곽종석 문하에 있었으며, 곽종석의 수제자였다. 1900년 경상부교관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다가, 1904년 정릉참봉, 영희전참봉, 경기전참봉 등을 지냈으나 정국이 어지러움을 알고 그만 두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모집하여 서울의 의무소로 보내고, 국민회와 일본인 통감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의 강압을 성토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저서로 '의부아림죽지사 68장'등이 수록된 문집 14권이 있다.
주남고, 주남수 가족묘
주남고(주남선)는 1919년 8월, 오형선(吳亨善)·고운서(高雲瑞)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군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김태연(金泰淵) 인솔하에 만주 군정서로 파견되었고, 1920년 3월 주남수는 다시 귀국하여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등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초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8년 12월에는 거창(居昌)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40년 1월에는 경남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모임을 이끌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주남수는 경남 거창(居昌) 사람이며, 1919년 8월 형 주남고(朱南皐)의 권유로 김태연(金泰淵)의 인솔하에 이사술(李四述)·이성년(李聖年)·백기주(白基周) 등과 함께 만주군정서(軍政署)에 의용병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3월에 만주군정서 의용군으로서 다시 국내에 파견되어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라는 독립사상에 관한 문서를 오형선 집에서 수천부를 등사하였다. 이어 이 문서를 정장현(鄭章鉉)·이갑수(李甲洙)·안덕보(安德保)·유진성(兪鎭成) 등에게 배포하다 거창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21년 1월 8일 소위 제령(制令) 및 출판법 위반으로 구속 송치되었다. 그러나 동년 9월에 탈출하여 다시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약하던 중 순국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남고 추모비
주남고 추모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주남고(1888-1951)의 이명은 주남선(朱南善)이다. 주남고 추모비는 전면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계시록 2:10', 후면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요한복음 8:32'라고 적혀있으며, 주남고약력과 거창교회 약사가 적혀있다. 주남고는 1919년 8월, 오형선(吳亨善)·고운서(高雲瑞)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군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 군정서(軍政署)에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김태연(金泰淵) 인솔하에 만주 군정서로 파견되었고, 1920년 3월 주남수는 다시 귀국하여 오형선(吳亨善)·송명옥(宋明玉) 등과 함께 신한별보(新韓別報)등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21년초에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8년 12월에는 거창(居昌)교회 목사로 있으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40년 1월에는 경남의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이를 강조하는 모임을 이끌다가 다시 일경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광복운동 모임장소 오례서원 원정비
백촌 김문기 선생의 현손인 영사공께서 여섯째 아들 장수를 데리고 영동군 미그리에서 살다가 백촌 선생께서 단종 복위운동을 하시다 처형되자 삼족을 멸한다 하여 피난처를 찾아서 거창군 신원면 덕신리 매봉산 아래 근터에 숨어 지내다 웃터에 녀려오셔 거주하시다가 현마을로 내려와 자리 잡으셨다. 마을 앞 조상걸에 돌로 조상을 모셨으니 세월이 흘러 돌 모은 것이 수해로 얿어지자 마을 안정을 위하여 현제 마을 앞 당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예전에는 조산말이라고 불렸으나 중유리 예동에 사시던 면우 곽종석 선생께서 연수사에 공부하러 다니시다 가끔 들리시면서 이 마을은 예을 꺠달았다 하면서 悟禮(오례)마을이라고 이름 지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달산공파 종중 형덕공께서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작은 서재를 지어 집안사람들에게 한학을 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깐 윤권공을 비롯한 달신공파 종중 어른들께서 받아드리자 서재 터는 내가 희사하겠노라 하며 집을 짓게 되어 시작하자 목수분들이 집을 자꾸만 키워서 지어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종파 상규공 계파 형장공께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참하여 덕은공파 종중서재를 세우자 간청하니 맏아들이 지금의 서원이 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하여 모덕제 현판을 걸고 윤권 형장 형배 상규 영규공을 비롯한 종중 어른들께서 각 고을 선비를 모셔 유계를 치러 오던 중 거창에 이참사를 비롯한 유림선비님들이 본 손에 청하기를 단종 복위 운동을 하시다가 처형당하신 백촌 김문기 선생과 아드님이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신 여병제 현석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례를 지내자고 청하여 본손이 받아들여 사당을 짓고 모덕제 현판을 내리고 추원제 현판을 걸어 음 3월 中丁(중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던 중 인당 진석공께서 문화재 신청을 하여 1992년에 도문화재 191호를 지정받아 1994년도에 수리 보수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 인당 진석공께서 오례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2006년에 뜻하지 않는 수해로 인하여 서원과 충의문 남문이 유실되어 문화재청에 복원하여 2008년에 완공했다. 지금 음력 3월 中丁(충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그리하여 자손만대 기리 전하기 위하여 백촌 19세손 여러분이 기록을 남겨본다.
옥천사
옥천사는 경남 고성에 위치해있으며, 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한 곳이고,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상태와 이주현등은 옥천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고,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신화수는 1919년 4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비멸결사 혁신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8월 김상옥, 한훈 등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진은 1920년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황태익 묘
황태익(1877-1953)은 천도교인으로 1919년 3월말에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변우범(卞又範)과 태극기 수십장을 제작하였다. 4월 1일에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鎭田面日岩里)에서 변상태 등과 시위군중 1,500여명을 지휘하였으며 군중을 선도하다가 일본 수비대와 충돌하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20년 3월, 경남 진주(晋州)에서 경남결사대(慶南決死隊)를 조직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4월에는 경상남도 일대를 순시하는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고, 6월에는 일제고관을 처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정원 창의비
최정원(1892-1922)은 1919년 3월 20일에 고성군 구만면(九萬面)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고성읍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작성하여 각 군면에 발송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밀파된 윤영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을 받은 허재기와 같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정원 집
최정원(1892-1922)은 1919년 3월 20일에 고성군 구만면(九萬面)에서 만세운동을 주동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고성읍에서 동지들과 함께 한인관리 퇴직권고문을 작성하여 각 군면에 발송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밀파된 윤영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지령을 받은 허재기와 같이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3일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