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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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최대현 집 터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대현 묘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江下面)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楊西面) 도곡리(陶谷里)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江上)·강하·양서·고읍(古邑)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항로 유적지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대표한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유적지이다. 유학자인 김형묵, 최익현, 양헌수, 유인석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이 발전적으로 집대성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에서 의병 항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 의해 의병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 나갔는데, 화서학파들은 을미사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 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개화(反開化), 항일(抗日)운동은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에는 위정척사사상의 화서학파의 창시자인 화서 이항로의 생가를 비롯하여 묘소와 신도비, 후학을 가르쳤던 벽계강당, 이항로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노산사 등이 있다.
이근원 추모비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추모비는 2009년 8월 15일 지평의병정신선양회가 양평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비신이 2.1m 정도 규모, 비문은 약 2,400여 자로 이루어졌고, 비문은 벽계서당 훈장 정석현이 짓고, 두전(頭篆)은 사단법인 화서학회 이사장 이종익이 썼으며, 교정은 정삼현이 하였다.
이근원 묘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던 이근원의 묘이다.
백명흠 묘
백명흠(1909 - 1936)은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으로, 1927년 신간회의 창립에 감화되어 1930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5년 투쟁자금 확보를 위해 서울 종로3가의 중앙병원을 구입 운영하였고,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감행하였다. 항일투쟁 활동 중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다 1936년 7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었으나, 그날 오후 순국하였다.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명륜학교(용인독립운동유적지)
명륜학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1호인 용인향교(일명 구성향교) 내에 설립되었던 용인 최초의 신식학교로 구한말 나라의 위기를 근대교육으로 극복하자는 애국사업의 일환에서 1906년 개교하였다. 명륜학교의 초대 교장은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李道宰)로, 당시 명륜학교에서 가르치던 과목은 서당, 또는 향교나 서원에서 행해졌던 전통 한학교과와 역사·과학 등 근대적인 교과가 혼합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명륜학교가 전통교육 기관에서 근대학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명륜학교의 설립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1862~1933)은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구한말 대학자로, 명륜학교 제자들은 모두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재로 성장하였는데 제자들 중에는 만주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김혁과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영선, 3·1운동 때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되어 옥사한 어대선(魚大善) 등이 있다.
장형 묘
범정 장형(1889 - 1964)은 평북 용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에 만주와 경성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만주에서 군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고, 치료소와 만선토지개간주식회사, 미곡상과 정미소 등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조달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장형은 1964년 12월 30일에 서울 내수동 자택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단국대학교 한남동 서울캠퍼스 내에 매장되었다가 2007년 단국대학교 캠퍼스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위치인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내로 이장되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윤식 묘
김윤식(1902 - 1950)은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준비 계획하다가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하고 공소(控所) 제기하여 무죄(無罪)를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의 상고(上告) 제기 등을 거쳐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강종근 순교기념비
강종근(1901 - 1942)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1930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며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붙잡혀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영학 순교기념비
김영학(1877 - 1932)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최윤성 묘
최윤성(1893 - 1945)은 황해도 봉산(鳳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고 피신하였다고 한다. 1920년 1월 황해도 평산군에서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의 목적하에 등사기로 군사공채모집 취지서와 통지서 60여 부 작성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0년 4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