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TOTAL. 45 건
강명호 묘
강명호(1924-1992)의 호는 민수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 말 강제 징집되어 일본군에 배속되었다가, 1944년 4월 한국인 청년들과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重慶]으로 가서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요원으로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는 광복군 대원들의 군량 수급, 신입 대원의 교육 훈련, 연합군의 인원 요청 시 파견할 인원 파악 등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초모(招募) 작전과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군 점령 지역에 대원을 파견하는 임무와 연합군과의 합작 공작 임무 등도 수행하였다. 1946년 5월에 광복군 본진과 함께 귀국했으며, 1992년 5월 15일 대구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 공훈을 기려 1977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장언조 묘
장언조(1924-1998)는 대구 보광학원 4학년 재학 중, 민족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하기도 하였다. 1943년 10월에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강제 징집되어 중국 후난성[湖南省] 헝산[衡山] 일대에 배속되어 군사 훈련을 받고,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 주둔 중국군을 공략하기 위한 즈장[芷江]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창사[長沙]·상담[湘潭]지구에 배속 중,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1945년 2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 정훈요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장언조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되었다.
장성표 묘
장성표(1924-1999)는 1943년 10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파견 일본군에 배속되어 있던 중, 중경(重慶)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大韓民國 臨時 政府)와 광복군(光復軍)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1944년 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호북성(湖北省) 신점진(新店鎭)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제9전구 유격대에서 항일 운동을 하였다. 중국군 제9전구는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호북성(湖北省)의 양자강 이남과 서북부 지역을 관할하는 전구(戰區)였다. 일본군을 탈출한 한적 사병(韓籍 士兵)이 증가하자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광복군 공작대는 이들을 광복군으로 편성하였는데 장성표는 1945년 5월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성되어 초모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장성표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한형석 집
한형석(1910-1996)의 이명은 한유한이며,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신예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며 항일 가곡 등을 작곡한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10월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될 때 이에 합류하였다. 전지공작대 예술조장을 맡은 한형석은 다양한 독립군가와 연극을 창작하였다.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 등을 작곡하였으며, 「국경의 밤」, 「아리랑」 등을 공연하여 중국군과 일반 대중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에서 교관을 역임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한형석은 『광복군가집』 1, 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 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한형석은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지청천 집
지청천(1888-1957)의 이칭은 이청천, 호는 백산이며, 일제강점기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광복군 총사령부 사령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자 군인이다.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1962년에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응삼 순절비
김응삼(1886~1909)은 전남 구례(求禮) 출신으로서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기의한 고광순(高光洵)의 의진에 입대하였다.1907년 9월 15일 동지 2백 명과 더불어 동복(同福)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한편 의병을 소모(召募)하고, 군기(軍器)를 수집하여 전세를 올렸으며, 각지를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1907년 10월 17일 지리산 구례 화개동(花開洞)의 연곡사(燕谷寺)를 본영으로 삼아 그 일대의 적병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광주수비대(光州守備隊)에게 내습을 당하였다. 이때 전군을 2대로 나누어서 적과 교전하였으나 하동(河東) 방면으로부터 다시 적군이 들이닥쳐 의진은 역부족으로 궤멸 당하였다. 이 전투에서 지휘부의 고광순과 고제량이 전사하고, 고광훈은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김응삼 역시 이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나월환 비
나월환(1912 ~ 1942)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대원들은 중국에서의 항일전이 곧 우리의 독립전쟁이라 인식하고,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청년들을 총집결시켜서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공작대장이었던 그는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제5지대는 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河南·華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서안(西安)에서 군민위안 및 일선장병위문품 모집 공연을 하였는데 그는 이 대회주임으로 "국경의 밤", "한국의 1용사", "아리랑" 등을 공연토록 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건수 위적비
정건수(1924~2002) 지사는 1943년 10월 중순 경,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당하여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지구(安邑地區)에 주둔하는 일본군 3541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때, 중국 중경(重慶)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광복군(光復軍)이 있다는 정보를 일본군 병사로부터 전해듣고 광복군으로 입대하기 위하여 1944년 11월 일본군을 탈출하였다. 1945년 4월 중국 중경에 도착한 그는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고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光復軍 總司令部 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임무를 맡아 수행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성동준 집
성동준(成東準, 1912~1980)은1944년 일본구주제대 법과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동원되었으나 중국 소주에서 김영남 등과 함께 무기를 휴대하고 일본군 60사단을 탈출하였다. 제3전구 충의구국군사령부에 도착하여 미국 고문관에게 일본군 문서와 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 사실은 3전구 사령부에 보고되어 전선일보(戰線日報)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러한 공적으로 구국군 정치부 대일선전과에서 박 영과 함께 선전활동을 전개하다 광복군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박병두 공적비
박병두(1919~1996)는 전남 완도 출생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도중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을 위해 피흘려 묵숨까지 바치라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광복군 제 3지대 징모처에서 정보공작활동 중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장희수 항일 기적비
장희수(1924 - 1990)는 1943년 10월 중순 경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산서성(山西省) 안읍 지구(安邑地區) 주둔 일본군 3541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던 중 1940년 중경 임시 정부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는 것을 알고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1944년 12월 부대를 탈출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4월 중경에 도착한 후 광복군 토교대(土橋隊)를 거쳐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45년 8월 해방을 맞아 귀국하였다. 장희수는 1986년 4월 26일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종희 추모비
이종희(1890 - 1946)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를 거쳐 광동(廣東)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의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를 졸업하고 상해(上海) 남경(南京)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중국군 부대 상위연장(上尉連長)으로 복무하면서 남경(南京)에서 의열단 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교관을 맡기도 하였다. 1936년 2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입당하여 군사국 특무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제요인 암살 등을 지휘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김약산(金若山)·박효삼(朴孝三)·이익성(李益星)·김세일(金世日) 등과 함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하여 조선혁명청년들에게 정확한 전투적 정치 노선을 제시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광복군 제1지대의 소교(少校)로 임명되어 총무조장으로 복무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 본부는 중경(重慶)에 있었으며, 주로 대원들의 군량 수급 사무,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훈련과 연합군측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요청할 경우의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지대장 특명으로 수시 적 점령지구로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그는 초대 지대장인 김약산(金若山)의 뒤를 이어 제2대 제1지대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1942년 10월에는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전라도 의원선거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 시까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과 광복군 고급참모로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귀국 도중 선중(船中)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