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TOTAL. 45 건
석호문 공적비
석호문(1923-1981)의 자는 우익, 호는 호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42년 성주농업실수학교(星州農業實修學校)[지금의 성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 1944년 6월 중국 하남성(河南省)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후, 광복군 제2 지대 제3 구대 제1 분대에 배치되었다. 1945년 5월 광복군과 미군의 연합 군사 훈련에 참가하여, 3개월 동안 통신 파괴와 교란, 정보 수집, 유격대 조직 등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술 훈련을 받았다. 교육 훈련이 끝나면 국내로 파견되어 일본군 군사 시설의 파괴와 함께 지하군을 조직하여 정보 활동을 벌이다가, 미군 상륙 부대와 협력하여 본토 수복 작전을 수행할 계획이었다.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광복군이 한미 공동 작전 대원 및 제2 지대 대원 약 100명으로 만든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황해도반에 편성되었다. 노성환(盧星煥), 황삼룡(黃三龍), 이동환(李東煥), 홍기화(洪基華), 신덕영(申悳泳), 이우성(李宇成), 허봉석(許鳳錫), 송수일(宋秀一)과 함께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준비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2월 광복군 상사로 예편하고,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초급 행정 특보 위원, 대표 행정 자치 위원을 지냈다. 1981년 10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으며,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해옥 묘
박해옥(1924-1988)은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 말기 안동 출신의 한국광복군 대원들은 1944년 일제에 징병된 뒤 중국 제9전구로 이동하다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으로 편입한 경우가 많았다. 이 밖에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만주사변과 중일 전쟁 때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편입된 경우도 있었다. 박해옥은 1944년 학도병 징병 1기로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1945년 1월 11일 소속되어 있던 일본군 히노키[槍]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제9전구 지역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제1분대에 편입되어 일본군에 맞서 조국 광복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진영 집
이진영(1907 - 195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중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진영 추모비
이진영(1907 - 1951)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송병철(宋炳喆)의 권유를 받고 조선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특별히 설치된 한국 군관훈련반에서 정치훈련과 전술 및 내무·교양관계의 학과를 훈련받았다. 낙양분교(洛陽分校) 한국군관훈련반은 1년도 못되어 해체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는 낙양분교를 제3기로 졸업하고 남경(南京)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 지하운동에 가담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중앙군 특별반을 졸업하고 한구(漢口)에 와서 선전공작원으로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폭로하였다. 1938년 봄에 김약산(金若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무한(武漢)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 좌익계통의 정당과 합작하여 이른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그 후로 간행물 등을 펴내어 대일 선전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와 교섭하여, 같은 해 10월에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창설하였다. 이때 그는 통신처(通訊處) 의창주임(宜昌主任)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4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과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1943년부터 광복시까지 그는 광복군 부령(副領)으로 총사령부 참모처 3과에 배속되어 복무하였다.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으며, 6·25전쟁 중 화순지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서룡 묘
애국지사 송서룡(1916 - 1979) 공은 항일 전선의 첨단을 누비며 싸운 광복군의 일원이다. 서산 송씨로 상조는 문익이요 중조는 이석으로 평안도 지방의 성족이다. 부는 태환이요 모든 이숙영으로 1916년 3월 8일 평북 운산군 북진면 진동에서 출생 15세에 북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중학교에 재학중 노골적인 차별 대우를 받고 1932년 하기 방학으로 귀국하자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의 침략을 맹렬히 성토한 끝에 잡혀 20여일이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서 더욱 배일의 사상은 굳어졌다.1935년 4월에는 완농광업소에 취직하여 민족 운동의 서클을 조직했다가 다시 잡혀 많은 고초를 당한 후 대륙으로 건너가서 구국의 항쟁의 길로 들어갔다.소간찬 동지와 죽음의 맹세를 손을잡고 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하남성 이북현 하읍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1942년 봄 광복군 제6변사 분처에 입단 소정의 훈련과정을 수료한 뒤 추양현으로 파견되어 지하 공작원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귀덕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특파단 제16대대 3중대 소속으로 임천과 주가구 등지에서 항쟁중에 광복을 맞았다.196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방봉순 묘
방봉순(1918 - 1998) 지사는 1918년 9월 황해도 안악군 안악읍 서산리 246번지에서 방경흡을 부로 곽익순을 모로 하여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안악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운전기술자로 활동 중 1945년 5월 한국 광복군 지하 공작원 박윤기와 접선 광복군 제3지대 소재지인 부양으로 이동 중 귀덕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되어 헌병대 영창에서 악독한 고문을 받았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으로 석방되어 1945년 10월 19일 부양 본대에 도착하였다.
이승주 묘
이승주(1922 - 1990)는 평북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중경(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인 토교대(土橋隊)에 소속되어 임정요인들의 신변보호, 경호 활동 등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신길우 묘
신길우(1924-2003)는 경북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신길우는 1943년 10월 일제에게 강제로 징집되어 중국 남경지구 주둔 일본군 부대에 배속되어 있으면서 중국 충칭[重慶]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 1944년 4월 탈출에 성공한 뒤 중국군 유격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45년 4월 충칭에 도착하여 광복군 토교대(土橋隊)에 입대하였으며, 광복군 총사령부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복무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하였다.
김명천 묘
김명천(1916-1999)의 자는 인전(仁前)이다. 3살 때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부득이 만주 펑톈성(奉天省) 시펑현(西豊縣)으로 이주하였고, 철령육영학교(鐵嶺育英學校)와 하얼빈(哈爾濱)의 고중(高中,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북만주 지린성(吉林省) 동북항일군 독립단 무술대에서 종군하였다. 당시 일본군 점령 지역인 이란현(依蘭縣) 이도하자(二道河子) 탈환 작전에 참전하여 대도회(大刀會)·홍창회(紅槍會)가 백병전으로 일본군 주력부대를 격멸하여 항일 연합군 철수 진로를 개척하는 데 참여하였다. 한편 일제는 각지에서 봉기하는 중국인 의용군을 토벌하려고 중국 동북 각지에 관동군을 분산 배치하여 직접 만주국군을 지휘한 결과, 중국 항일의용군은 큰 타격을 받았고 항일 투쟁의 기세도 한풀 꺾이게 되었다. 1932년 12월 만주의 주요 거점 지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됨에 따라, 소속된 한·중 연합군부대와 함께 소·만 국경지역의 미산(密山)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후 소·만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이동하여, 1933년 2월 러시아령 두으므스크에 이르러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무렵, 지린성장(吉林省長) 리두(李杜)의 자위군 및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마잔산(馬占山) 부대와도 조우하였다. 같은 해 5월 중국 서북 지역의 신장성(新疆省)에 도착하여 동북항일구국군은 신장변방군으로 재편되어 군사훈련과 후방 치안 유지에 힘쓰면서 지방민의 반란 폭동 진압작전에도 여러 차례 동원되었다. 1939년 5월 신장성의 중국중앙군관학교 제9분교에 입교하여, 1940년 10월 제3기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한편 1944년 11월 광복군 제2지대 공작조의 일원인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이 중국군 제34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산시성(山西省)·허베이성(河北省) 등지에서 초모 활동招募活動 및 지하 활동을 통해 적의 정보를 탐지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군 점령지구에서의 초모 활동을 통해 전성윤·최창모·윤치원·김두환·박승렬·최복련·김선옥 등의 탈출을 도왔다. 이때 시안(西安)으로 와서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에 편입되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이헌일 묘
이헌일(1917-1979)은 1943년 9월 광복군 제3지대장의 지령으로 이장식(李張植)·김군남(金君南) 등과 함께 화난[華南]·한난[漢南]·광둥[廣東]·안난[安南]·항저우[抗州]·상하이[上海] 등지에 밀파되어 활동하였다. 1944년 5월 난징[南京]에 밀파되어 공작 중이던 이상일(李想一) 등이 체포되자 공작을 중단하고 귀환하였다. 8월에는 특수공작훈련대에 편입되어 훈련 수료 후 적 후방 지하공작원에 임명되었고, 쉬저우[徐州] 지구에 파견되어 일본군 내 한인 병사 탈출을 도모하였다. 이헌일은 1945년 2월 중국 중앙군 10전구 102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참모로서 적 후방 유격대 편성 등을 지휘하며 광복 때까지 활약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중국군 제10전구 사령장관부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대원 20명과 함께 일본군 무장해제 업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헌일은 1979년 4월 17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이헌일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영진 묘
박영진(1921-1950)은 일제강점기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 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 김천성(金天成)‧ 김용주(金容珠)‧이월봉(李月峰)‧이삼녀(李三女) 등과 함께 중국 제34 집단군 타이항산주1〔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주2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일본군 점령 지역에 잠입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초모(招募)주3하는 것이었다. 타이항산 입구에서 박영진은 김동수 등과 함께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사진관을 운영하는 문응국(文應國)을 비롯하여 6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초모하였다. 초모된 인원은 대부분 본부가 있는 시안으로 후송되었다. 1940년 말에 이르면 1백여 명에 가까운 대원을 확보한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지공작대가 적의 후방에서 초모 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였고, 전지공작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박영진은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통합하여 개편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중일전쟁주4이 가속화되고 일본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한국광복군 공작대가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것은 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김원봉(金元鳳)은 최성오(崔省吾)와 주세민(周世敏)을 파견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충칭〔重慶〕의 영국대사관 부관 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지청천) 총사령관과 주인도(駐印度) 영국군 동남아 전구(戰區)주5 총사령부 대표 매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 · 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 인도와 미얀마 전구)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따라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박영진은 공작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인면공작대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으로는 최봉진‧ 김상준‧나동규‧송철‧김성호‧이영수 등과 박영진이었다. 박영진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인도로 파견되었다. 1943년 12월 전방 지구인 인도 임팔주6(Imphal)에 주둔 중인 영국군 제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박영진은 제201부대 본부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여 1945년 연합군이 미얀마 지구의 일본군에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박영진은 한지성‧김성호와 함께 미얀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를 향해 남진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미얀마 수도 양곤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5월 초 양곤을 탈환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해 7월 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으며, 9월 10일 대장 한지성 및 동료들과 함께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세용 묘
김세용(1907-1966)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정보수집과 초모공작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40년 4월 중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하였으며, 그 뒤 광복군으로 귀속되었다. 그 뒤,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특과총대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第四團特科總大員隊韓靑班)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적 점령지구에 침투하여 한·중 양국 민중들의 항일의식을 환기시키고, 지하조직을 통해 정보수집 및 초모공작을 전개했다. 1944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한미합작의 특수훈련(OSS)을 받은 뒤 국내진공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