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동명학교유허지비, 일심재유허비
1910년 애국지사 오봉(吾峯) 이연건(李鍊乾)선생과 백헌(白軒) 이중건(李重乾)선생께서 경남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두곡리(杜谷里)에 설립한 동명학교는 함안군에서 2번째 학교로서 최초의 사립학교이며, 설립배경과 취지는 일제치하의 유학 중심의 문중이 쇠퇴해감을 통감하고 민족 광복의 길은 2세 교육에 있음을 생각하여 신문학을 가르쳐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오봉(吾峯) 이연건(李鍊乾), 문일(文一) 이백구(李伯九), 월담(月潭) 이학구(李鶴九), 백헌(白軒) 이중건(李重乾) 께서 일심재(一心齋) 재실을 철거하고 교실 6동을 건립하고, 1913년 개교는 하여 남녀공학 4년제로 처음엔 주간으로 수업하였으나 일제탄압에 야학으로 교육하였다, 학생들은 일백여명으로 적을 때에도 60여명은 되었고, 교사진은 이희석(李熹錫), 안기호(安畿鎬), 여해(呂海), 이영재(李榮宰), 안영중(安英中), 이필수(李弼洙), 박건영(朴鍵灵), 강기수(姜琪秀), 이은상(李殷相), 등은 민족사관이 뚜렷한 서울과 마산에서 초빙하여 이중건과 이연건 선생의 동지들이였다. 교사의 봉급은 이학구(李學九)의 도움을 받다가 그 사후는 이종곤(李鐘坤)의 도움을 받았다, 교육과목은 조선어, 노동독본, 노동산수, 국어와 일어(국어), 등이었고 국어는 일어로서 형식만 시간표에 넣고 가르치지 않았고, 민족의 정기를 고취하기 위하여 국사는 필수과목으로 사료되며, 동명학교는 함안 항일운동의 산실이 되었고 1919년 3월 19일 경남 함안군 함안읍 의거의 거점이 되어 의거에 사용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는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손수 만들어 사용하였다.
송병선, 송병순 암각문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훈을 기렸으며, 충남 대전에는 고종의 건사지명(建祠之命)으로 건립된 문충사(文忠祠)가 있어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송병순(1839-1912)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내영 집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내영 공적비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내영 구 묘
정내영(1900 - 1961)은 1920년 송두환·김종철·최해규·정동석·김봉규 등과 경북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의령경찰을 사살하고 도피하던 중, 1924년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도 중국과 국내를 비밀리에 다니면서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90년 정부는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완 집
최완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완 묘
최완(미상 - 미상)은 독립유공자 최준의 동생이다. 최완의 '휘'는 '완'이고, '자'는 '내수'이며. '초명'은 '영지'이다. 최완은 80여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재무부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사원과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던 중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운명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령군 국채보상운동기념비
경상북도 고령군에 위치한 고령군 국채보상운동 기념비이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할 목적으로 획책한 국채1300만원을 갚는다는 국권수호운동이다. 대구단연회에서는 고령향교에 공함을 보내 단체 결성을 요청했고, 홍와 이두훈 선생이 고령단연회 회장직을 임명받았다. 활발히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의연금 처리가 해결되지 못하자 고령향약회가 중심이 되어 본군의 의연금을 향중에서 관리하기로 결의했다.
서상돈 송덕비
서상돈(1950 - 1913)은 일제강점기 경상도시찰관, 독립협회 제4기 재무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서상돈(徐相敦). 세례명은 아우구시티노. 출생지는 대구이다. 증조부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 되었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헌종 5)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 · 상주 등지로 피난, 1859년(철종 10) 대구에 정착하였다. 한편,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이의 수호에 앞장선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는데, 독립협회 제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들이 2,000여 환을 갹출하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로 하고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그 요지는 국채 1300만환은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며, 나머지는 특별모금한다는 것이었다.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을 비롯한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편강렬 순국기념비
편강렬(1892 - 1929)은 일제강점기 105인 사건, 구월산주비단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애사(愛史). 황해도 연백 출신. 편상훈(片相薰)의 셋째 아들이다. 이강년(李康秊)의 의병부대에 가담, 1907년 선봉장 겸 소모장이 되어 구국항일운동에 가담하였다. 1908년 서울 진공작전을 펴기 위해 휘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동해안을 돌아 강릉을 거쳐 경기도 양주에 당도했으나 일본의 대군을 만나 패하였다. 이 싸움에서 중상을 입고 태백산 본진으로 돌아가 재기의 날을 기다리던 중, 이듬해 봄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큰형 편수열(片壽烈)의 권고로 귀가하였다. 1910년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면서 비밀지하운동을 전개하다, 이듬해 ‘105인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영남 일대에서 동지를 모은 뒤 박상진(朴尙鎭) 등의 의병들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담,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황해도 일대에서 맹활약하였고, 동생 편덕렬(片德烈)을 상해에 파견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그 해 이른바 구월산주비단사건(九月山籌備團事件)에 관련되어 해주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경하여 박영효(朴泳孝)·노심선(盧心仙)·김수장(金水長) 등과 국내 각지의 일제시설을 파괴할 것을 계획하고, 만주에 있는 각 단체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김경배(金庚培)·김태규(金泰奎)·조종호(趙鍾鎬) 등과 만주로 건너갔다. 1923년 회덕현(懷德縣) 오가자(五家子)에서 양기탁(梁起鐸)·남정(南正) 등과 의성단(義成團)을 조직, 단장으로 뽑혔다. 그 후 단원 5명과 함께 장춘(長春)에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고, 봉천에서는 단원 7명과 함께 일본 헌병과 장시간 시가전을 벌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통의부(統議府)·구국단(救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만주에 있는 각 독립운동 단체와 서로 연락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안창호(安昌浩)·양기탁 등과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할 목적으로 활동 중 하얼빈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국내로 압송되어 7년 징역형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중 척추염이 발병해 안동적십자병원에서 사망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면주 묘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면주 집
이면주(1827 - 1910)는 조선 후기에, 이조좌랑, 자여도찰방,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이석우(李錫宇). 자는 윤래(允來), 호는 계은(桂隱)·하계(霞溪). 경상북도 봉화 출신. 태종대왕의 7남 온령군(溫寜君)의 후손으로 이치두(李致斗)의 아들이다. 김숙(金熽)의 문인이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순강원수봉관(順康院守奉官)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지평·이조좌랑을 역임한 뒤 1860년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이 되었다. 1862년 간신배의 모함에 빠져 무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특사로 풀려났다. 1864년 정언·장령, 이듬해 부수찬, 1866년 부교리·좌부승지·동부승지, 1879년 병조참의, 1891년 부승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905년 일제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자 그 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1910년에 국치를 당하자 음독자결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