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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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사
성암사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이주환의 스승 송병선(1836-1905)은 송시열의 9세손이며 송병순의 형이다. 조선 후기 문인이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송병선은 국권을 빼앗긴 뒤 자결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이 세사람을 배향하기 위해 1924년에 사당을 건립했는데, 사당은 맞배지붕의 목조기와 건물로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이고 만인재도 맞배지붕으로 조선 후기 재실 건축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주환 묘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관제 묘
김관제(1886-1951)는 1909년 안희제(安熙濟) 남형우(南亨祐) 윤세복(尹世復) 이시열(李時說) 이원식(李元植) 김동삼(金東三) 배천택(裵天澤) 박중화(朴重華) 신백우(申伯雨) 김태희(金泰熙)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新民會)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 이시열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그 교사가 되어 교포자제에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동창학교가 폐쇄되자 1915년에 압록강 대안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그 교사로 활동하였다. 김관제 묘는 경남 고성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최낙종 집
최낙종(1891-1945)은 고성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인접면인 회화면(會華面)까지 사전연락을 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의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최낙종은 선두에 서서 열렬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다음날 동권고문을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1920년 일본 동경에서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창립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여 1932년까지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徐相漢)·이 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勞動)」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에는 벌금 40원, 1926년에는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세권 집
정세권(1888-1966)은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동(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희사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세권 구 묘
정세권(1888-1966)은 1923년 1월 조만식(曺晩植)·안재홍(安在鴻) 등을 중심으로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가 발기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서울 지회를 설립했다. 조선물산장려회 서울 지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의 경리부 상무이사, 중앙회 이사로 선출되어 회관건립·강연회 등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적극 찬동하여 서울지회에서 활약했다. 1930년 11월 신간회 서울지회의 대회준비위원회에 김응집(金應集)·홍기문(洪起文) 등과 함께 재정부원으로 활동했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하면서 독립된 사무실이 없어 고난에 처하자, 1935년에 서울 화(花洞)에 있는 2층 건물과 부속 대지를 희사하여 조선어학회의 국어운동과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우순 묘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순 순의비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순 사당(서비정)
서비정은 경남 고성에 있으며, 서비정은 순절 소문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과 지사들이 공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며, 해마다 향사를 모시어 최우순의 의절을 추모하고 있다.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순 집
최우순 선생은 조선 말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지금 천지가 바뀌어 종묘사직은 망하고, 머리와 발이 뒤바뀌어 삼천리 강토에 편안히 있을 곳이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지금부터는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침식을 하며 서쪽에서 늙어 서쪽에서 죽을 것이다.” 하며 집 동쪽에 일본이 있다고 해서 사립문을 서쪽으로 돌리고, 아호(雅號)를 청사(晴沙)에서 서비(西扉)로 고쳤다. 경술국치를 강행한 일본은 전국의 유림들에게 일왕의 은사금을 주어 회유했으며, 그에게도 은사금을 받으라고 강요했지만 최 선생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이 헌병을 파견해 연행하려 하자 최우순은 헌병에게 지금은 밤이 깊어 갈 수 없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갈 것이라고 하고는 그날 밤 스스로 독약을 먹고 순절하였다. 1911년 3월 19일 향년 80세였다.
최낙종 창의비
최낙종(1891-1945)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성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의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1920년 동경에서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창립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여 1932년까지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徐相漢)·이 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勞動)」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벌금 40원의 선고를 받았고,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성두 기념비
배성두(1840-1922)는 김해에서 약방을 하였는데, 1893년 9월 8일 부산으로 가서 미국 북장로교 베어드 선교사(William M.Baird 1862~1931)를 만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복음을 전시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섬기는데 앞장섰으며, 1907년 김해 합성학교를 세워 많은 인재를 육성하였다. 배성두의 아들 배동석(1891~1924)은 1919년 당시 세브란스의전(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으로서 3.1만세운동의 학생대표로 활동하였으며, 김해와 함안 칠원지역의 3.1운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