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주기철 어록비
주기철(1897 - 1944)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이자 순교자이며 민족 운동가로, 장로교 목사로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일제는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으로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그는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저항하였으며, 이 일로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석진 묘
김석진(1847 - 1910)이 안장된 묘역이다. 1905년 11월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 반대투쟁과 파기운동을 벌이다 자결·순국하자 김석진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1906년 1월 22일 상소를 올려 을사5적 처단과 협박에 의한 을사늑약을 공법상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이어 매국노들과 같이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열에 설 수 없다는 소를 올리고 의효전향관 자리를 물러났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그를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현 서울시 번동의 창녕위궁 재사(昌寧尉宮 齋舍)에서 순국·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용인독립운동유적(이한응 묘)
이한응(1874 - 1905)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순국지사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 졸업 후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희승 집 터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박사(1896 - 1989)는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였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서울시 교육위원회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학술 저서로는 역대 조선문학정화국어학논고, 국문학연구초, 국어학개설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박꽃, 심장의 파편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벙어리 냉가슴, 딸깍발이 등 다수가 있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요약 자서전이 있다. 1948년에 역대국문학전집, 1981년에 국어대사전을 편저했다. 이희승 박사는 1989년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정태진 묘
정태진(1904~1952)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반하경 순국터
반하경(미상~1910)은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으로,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태진 기념관
정태진(1904~1952)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만식 동상
조만식(1883~1950)은 평남 강서 출신으로, 구한말에서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1913년 일본 명치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정주군 오산학교 교사에 취임하고 이후 교장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 때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적극적으로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오산학교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 조선물산장려회 주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신간회 평양지회장 등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과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연금당한 후 행방불명되었다.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범영 묘
이범영(1890~1955)은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의 독립지사·교육자로, 보성전문 법과 졸업 후 향리에 청성학교를 설립,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하여, 3.1학당 설립 운동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포천소비조합 창립 및 강화학교, 김천 광명학교, 밀양 정진학교, 영등포 영창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범영 송덕비
이범영(1890~1955)은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의 독립지사·교육자로, 보성전문 법과 졸업 후 향리에 청성학교를 설립,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하여, 3.1학당 설립 운동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포천소비조합 창립 및 강화학교, 김천 광명학교, 밀양 정진학교, 영등포 영창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범영 송덕비는 그의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사업에 바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 출신 독립 유공자 공적비 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포천 유지들의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이인 묘
이인(1896 - 1979)은 경북 대구(大邱) 출신이며,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이자 변호사이며 정치인이다.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2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이듬해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대법관,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제헌의회와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건국에 기여하였다. 만년에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주환 사적비
이주환(1854-1919)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에게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여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없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