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김태희 묘
김태희(1877-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이명은 이세기이며,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충청북도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남형우, 안희제, 이원식, 신백우,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 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辦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들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 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여하여 동지 정규택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태희 기념비
김태희(1877-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이명은 이세기이며, 일찍이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4년에 충청북도 청주에 청남학교(淸南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남형우, 안희제, 이원식, 신백우,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3 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적극 지원하여 1920년 9월 10일 연통제(聯通制)의 충청북도 독판부(督辦府)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문서들의 배포 등 국내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국민회(國民會) 충청북도 지회를 조직하여 그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주청년회(淸州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21년 전국의 청년회들을 연합하려는 운동에 참여하여 동지 정규택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창립총회에 청주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채호 동상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