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괴산3.1운동 7인열사비
괴산3.1운동7인열사의 비는 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신촌마을입구에 위치해있다. 일제에 항거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 고장 출신 김의현·김의대·박영래·정해문·양신집·지민수·김일곤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이다. 김의현(1880 - 1947)은 당시 장연면의 서당 교사로, 1919년 3월 3일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참례하기 위하여 제자인 박영래와 함께 상경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를 목격하였다. 귀향 후 김의대(1892 - 1925), 김일곤(1880 - 1946), 정해문(1882 - 1947), 지민수, 양신집(1882 - 1948)과 함께 거사를 협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장을 몰래 준비하였다. 거사일자를 4월 1일로 결정하고 각 동리의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박영래로 하여금 준비된 태극기와 선언문을 각 동리에 전달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가리 소재 면사무소 앞에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시위군중들과 함께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송병순 동상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동상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직 묘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집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묘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문명학교 터(삼수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이상직 집
이상직(1878-1947)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목표로 1909년 진천에 문명학교(文明學校)를 설립하고 교육 구국운동에 헌신하였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상직은 3월 15일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고자 자택에서 각 마을 대표 수십 명과 회합하여 준비했으나 이튿날 새벽에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고, 결국 이상직을 제외하고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석방된 후 4월 2일, 이상직은 제2차 진천의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켜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중병으로 석방되었다.1925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범태평양회의(汎太平洋會議)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신백우 사적비
신백우(1889-196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족친인 신채호(申采浩)의 권유로 이에 가입하여 서울과 충청북도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에는 합법적 외곽 청년단체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청년학우회 한성연회(漢城聯會)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1909년, 신민회 계열의 비합법적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 조직되자 남형우, 안희제, 박중화 등 80여 명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지하활동을 하였다. 1910년 8월, 결국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1911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성 일대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조부의 별세로 1918년에 귀국하였다가 1919년 3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한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에 귀국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윤덕병 등과 조선노동연맹회(朝鮮勞動聯盟會)를 발기하여 조직하고 그 기관지 『노동(勞動)』의 편집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7월에는 홍명희, 윤덕병 등과 함께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후에 火曜會로 개칭)를 조직하였으며, 1924년 윤덕병, 차금봉 등과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가 코민테른에의 대표파견사건으로 체포되어 6개월간 투옥당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제환 유허비
김제환(1867-1916)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호는 소당(素堂)이고, 청주 지방의 유생이었다. 교육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와 구국교육운동을 펼쳤던 김제환은 평소 배일의식이 강하며 일제의 호적에 기입을 거부하고 이른바 '경절'에 일장기를 달지 않으며 납세 및 부역 등을 거절하는 등 항일투쟁을 하였다. 1913년 2월 배일항거운동(排日抗拒運動)으로 일본 헌병에 붙잡혔으나 단식투쟁으로 같은 해 3월에 풀려났다. 그러나 곧이어 5월,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이산리(里山里)에서 '성산대강회(星山大講會)'를 개최하여 의거할 것을 주창(主唱)하다가 일경에 다시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선 총독이던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항일 유서를 송부한 후 단식하여 순절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성환 유허비
김성환(1875-1958)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정당(定堂)이다. 청주군 산내이상면(山內二上面) 문박리(文博里)에 서당(書堂)을 설치하고 한학을 가르쳤다. 1910년 8월 한국과 일본 양국 합병식(合倂式)을 보고 분노하여 생도 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5월 1일, 평소의 언동에 대해 청주경찰서(淸州警察署)에서 설유(說諭)를 받았으나, 김성환은 이 과정에서도 일본 경찰에게 병합의 부당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경찰서를 나와서도 생도 수십 명에게 “현시의 관리는 모두 난신적자(亂臣賊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그들을 박멸하고자 밤낮으로 오랫동안 고심하여 왔으나 아직 그 시기를 얻지 못하였다. 너희는 항상 이 뜻을 가슴에 품고 우리 대한국 신민(臣民)의 의무를 잊으면 안 된다.”고 설파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1913년 6월 12일 공주지방법원(公州地方法院) 청주지청(淸州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금고(禁錮)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장하 사적비
조장하(1847-1910)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으로,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죽음으로써 항의하기로 하고 의관을 깨끗이 갈아입은 다음 단식을 결행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