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신성여학교 교지
신성여학교는 1909년 10월에 프랑스인 선교사 말셀로 구레(우리 나라명 具瑪瑟) 신부가 우리 나라의 낙후된 여성교육을 위하여 설립한 신성여학교이다. 제주도에서 최초로 설립된 여학교로서, 제주시 삼도동에 있는 향사당을 교사로 하여 4년제 보통과로 출발하였다. 초대 교장에 김시진이 취임하고 교사는 홍두표(洪斗杓)·고원봉(高元鳳)·고분도(高芬道), 김아나다시아 수녀 등이었으며, 최초로 10여 명의 여학생이 입학하였다. 곧이어 보통과 외에 각 1년제의 유치과와 보수과를 신설하였다.당시의 교과목은 성경·수신·국어·이과·산술·국사·한문·수예·재봉·원예·창가·도화 등이었다. 1914년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으며, 이어 제2회 6명, 제3회 16명 등을 배출하였다. 그 뒤 설립자인 구마슬 신부가 전주로 전출되자 재정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이 기회를 노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어 1916년 7월 설립 7년 만에 재학생 150여 명을 남긴 채 휴교의 비운을 맞았다. 이어 교사불법명도령으로 폐교를 당하여 교사를 일본인 본원사(本願寺)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 뒤 졸업생들과 지방 유지들이 재개교를 기도하였으나 이룩되지 못하다가 광복 후 최정숙(崔貞淑)·홍완표(洪完杓)·고창호(高昌昊) 등을 중심으로 학교재건을 추진하여 1946년 9월 신성여자중학원으로 개교하였다. 1947년 10월에 신성유치원을 부설하고, 1949년 8월 신성여자중학교로 정식인가되었다.
문연서당 터
文淵書堂(문연서당) 터 표지석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조선시대 말엽의 문연서당(文淵書堂) 터. 일명 애교대(愛敎臺)라고도 하였다. 문연서당은 1891년(고종 28) 귤암(橘巖) 이기온 (李基瑥)이 칠봉서당(七峰書堂)을 창설,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문인이며 성균관 교수로 있던 고성겸(高性謙)을 강사로 초빙 교육을 개시했다. 1899년(광무 3) 화재로 고교수와 제자 1명이 소사하고 서당이 소실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 뒤 이 자리에 다시 문연서당을 세우고 아들 이응호(李膺鎬)가 계승,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또한 문연사는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참판의 유적과 귤암(橘巖) 이기온(李基瑥)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31년 1월에 그의 제자와 지사들이 귤암의 유허인 오라동 2951(현 제주문화방송, 옛 북제주군청 주변)에 시설하여 향사하던 제단이며 귤암의 비는 면암 참판 유배 시 유필을 음각한 것이다. 귤암선생은 광해군에 직간하다가 유배된 충신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후손으로, 제주에 유배 온 면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향리후진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또 귤암선생의 문하생들은 항일운동에 관여했던 조설대(朝雪臺) 집의계(集義契)의 주축이 되었다. 이 곳 문연사는 1977년 5월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 계획에 저촉되어 이 곳으로 이설하였으며 지금도 여러 후학과 뜻 있는 사람들이 음력 정월에 중정(中丁)에 제를 지내고 있다. 제자들은 최익현과 이기온의 사제동행을 기념하여 서당터에 문연사를 세웠으나, 1977년 5월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계획에 저촉되어 조설대가 있는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한편 조설대는 마을 고로(古老)들의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엽 이후 국상을 당하였을 때 백성들이 모여 곡하던 망곡(望哭)의 터로도 알려진 곳으로,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자 이응호(李譍鎬)를 중심으로 한 12인의 소장파 유림들이 집의계(集義契)란 모임을 결성해 설욕을 다짐하기 위해 모인 곳이다. 이들은 이 곳에 모여 항의 의지를 굳히고 울분을 달래며 광복투쟁을 결의하여 석벽에 "朝雪臺"를 음각하였다. 조설대의 뜻은 조선(朝鮮)의 수치를 설욕(雪辱)하겠다는 뜻이다.
부병준 기념비
부병준(1906-1952)의 호는 백도, 이명은 부건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1세 때 조기 결혼하였으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니혼대학 재학 중 민족주의에 눈을 떴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의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청년총동맹이 파견한 진상 조사위원이 되어 현지에서 동맹 휴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신좌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윈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부병준은 북촌, 구좌면의 동복, 김녕, 월정 지구를 담당하였다. 부생종(夫生鍾)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10월 혁명적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탄로나 조직원이 검거될 때 부병준도 검거되었다. 부병준은 1937년 4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제주문화협회 재일교포 연락 사무를 맡았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부병준 묘
부병준(1906-1952)의 호는 백도, 이명은 부건이며,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11세 때 조기 결혼하였으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니혼대학 재학 중 민족주의에 눈을 떴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의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청년총동맹이 파견한 진상 조사위원이 되어 현지에서 동맹 휴학을 지도하다가 체포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신좌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윈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여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부병준은 북촌, 구좌면의 동복, 김녕, 월정 지구를 담당하였다. 부생종(夫生鍾)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1934년 10월 혁명적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탄로나 조직원이 검거될 때 부병준도 검거되었다. 부병준은 1937년 4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제주문화협회 재일교포 연락 사무를 맡았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부생종 구 묘
해당 비석은 1936년 28세로 목포형무소에서 순국한 부생종 선생을 기리기 위해 동지들이 묘 비문에 옥사(獄死)라 새겨 세웠으나 '옥사'라는 글귀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심으려는 것이라 하여 동지들은 다시 잡혀가 옥고를 치렀고 비석은 조천주재소 창고에 압수되었다. 할 수 없이 '夫生鍾之墓'라고만 새긴 매우 작은 비석을 세웠다가 해방이 되자 지서 창고에서 그 비석을 찾아다 다시 세웠었는데, 1982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나서 1984년 북제주군수 명의로 '殉國烈士夫生鍾之墓'라는 커다란 비석이 다시 세워지면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출하던 그 비석은 우리 고장의 관습에 따라 무덤 앞에 묻어 버렸다. 2006년에 다시 꺼내어 산담 옆에 세워 두었다가 2008년에 조천리 항일기념관으로 가져다가 다른 비석들과 함께 마당에 세웠다.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천야학당 터
조천 야학당(夜學堂)은 1925년 6월 1일 항일운동가 김시용, 김시균 선생 등에 의해 이 곳에 설립되어, 마을 청소년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며 문맹을 물리치고 근대의식과 항일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1929년 조천 야학당에서는 조천청년동맹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자를 위한 야학도 실시하였으며 마을청년과 부녀자들을 상중동반(上中洞班), 중동반(上中洞班), 하동반(下洞班), 등 3배 반으로 나누어 교육시켰다. 조천리 새마을회는 민중계몽운동과 근대민족교육의 요람인 이곳 조천 야학당을 복원함으로써 후세들에게 지역의 역사와 전통, 올바른 민족 의식을 교육시키는 배움의 전당으로 삼자는 취지 아래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에 힘입어 2009년 7월 야학당 옛 자리에 2층 건물을 준공하였다. 조천청년동맹(제주청년동맹)은 청소년들에게 민족 계급 의식을 함양하게 하고 사회주의 이념 하의 대중 운동을 지향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소년단과 야학 개량 서당, 공립 보통학교 등에서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신인 제주 청년 연합회의 결속을 더욱 강화한 조직으로 개편된 제주 청년 동맹은 조천, 함덕, 북촌, 제주면 등 각지의 청년 단체를 지부로 두었다.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제주 청년 동맹의 맹원 수는 4,000여 명에 달하였다.
부생종 집
부생종(1909 - 1936)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부생종 묘
선생이 옥사하자 이를 분하게 여긴 동지들이 그의 무덤 앞에 '獄死夫生鍾之墓(옥사부생종지묘)'라는 비석을 세워 그의 영혼을 위로하려 하였으나, 이 비석의 '옥사'라는 글귀가 일본에 저항하는 의식을 심으려는 것이라 하여 동지들이 다시 잡혀가 옥고를 치렀고 비석은 조천주재소 창고에 압수되었다. 할 수 없이 '夫生鍾之墓'라고만 새긴 매우 작은 비석을 세웠다가 해방이 되자 지서 창고에서 그 비석을 찾아다 다시 세웠었는데, 1982년 8월 15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고 나서 1984년 북제주군수 명의로 '殉國烈士夫生鍾之墓'라는 커다란 비석이 다시 세워지면서 우리 민족의 기개를 표출하던 그 비석은 우리 고장의 관습에 따라 무덤 앞에 묻어 버렸다. 2006년에 다시 꺼내어 산담 옆에 세워 두었다가 2008년에 조천리 항일기념관으로 가져다가 다른 비석들과 함께 마당에 세웠다. 부생종(1909 - 1936)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지수 집
김지수(1845-1911) 선생은 이곳 계룡시에서 출생하셨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의 11대손이다. 호서지역 유학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논산지역에서 학계를 조직해 유림들을 결속하고 가문의 위상을 정립하는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1900년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사퇴하고 은둔 자정의 길을 선택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내놓은 회유책인 노인은사금(老人恩賜金) 수령을 거절하였으며, 헌병대의 회유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일제침략에 저항하다가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11년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오강표 순절지(강학루)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강표 순의기적비
오강표(1843 - 1910)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태어났다.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주청년회관 터 표지석
이 곳은 1932년 공주청년회관이 설립된 곳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항일단체인 신간회 공주지회가 활동한 근거지이다. 당시 공주제일교회 담임목회자들이 이 단체에 중요한 직책들을 맡아 수행하였고, 민중계몽과 강연회, 야학회, 토론회, 연극회, 체육회, 민립학교설립 추진등 공주지역의 근대 교육과 문화를 이끌던 뜻 깊은 장소이다. 2019년 공주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