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정인승 집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인승 묘
정인승 선생의 묘비석이다. 2006년 정부의 애국지사 묘지 이장사업의 일환으로 건재 정인승 선생의 유해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으로 안장하였고, 묘지에 있던 비석 및 석물은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129번지 선생님의 생가 터인 이곳으로 장수군민들이 이전한 것이다.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병로 동상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 선생은 전라북도 순창(淳昌) 사람이다. 어려서 전우(田愚)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 명치대학(明治大學) 법과와 일본대학(日本大學) 법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그후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중앙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에 유학 중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유학생의 장학금을 보조했다. 귀국하여 경성법률전문학교 조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를 지내고,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1922년 11월에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지도급 인사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1923년 3월 29일 각계 대표 400여 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해서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의한 대회에서 김성수(金性洙)와 함께 회금보관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허헌(許憲)·김태영(金泰榮)·이승우(李升雨)·김용무(金用茂) 등과 형사변호공동연구회(刑事辯護共同硏究會)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운동사건을 무료 변론했으며, 1930년에 이르기까지 안창호(安昌浩)·여운형(呂運亨) 등에 대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독립운동자에 대한 사건으로 정의부(正義府)·연통제(聯通制)·광복단(光復團)·김상옥(金相玉) 사건, 3·1운동에 잇달은 각지의 독립만세사건, 6·10만세 사건, 광주학생운동, 원산노조파업 사건, 조선 공산당 사건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많은 사건의 변호를 담당하였다. 1927년 2월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1929년 7월 1일의 전국복대표대회(全國復代表大會)에서 조사부장 겸 회계로 선출되어 활약했으며, 1930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특히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허 헌(許憲)·이인(李仁) 등과 함께 구속된 학생을 변호하기 위하여 최대의 성의와 노력을 기울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1946년에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초대와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병기 가람시비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홍범식 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서보단 기념탑
1903년 7월 15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규탄하는 항일집회인 호남유림대회가 내장산에서 열렸다. 무성서원이 호남지역 향교에 보낸 통문을 전달받고 결집한 유림 총 54명은 내장산 벽련암에서 모여 단(檀)을 쌓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며 복수를 맹세하였으며, 해마다 추모제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그때 쌓은 단을 서보단 또는 영모단(永慕壇)이라 하였다. 본 사적은 호남 유림들이 복수를 맹세하며 "서보단"을 쌓았던 장소에서 그들의 뜻을 추모하고자 광복 50주년을 맞아 건립되었다.
홍범식 군수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청덕선정불망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상 기념비
김영상(1836 - 1911)은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고부면(古阜面)에서 태어났다. 태인(泰仁)에 거주하며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다. 1895년 10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통분하여 국가의 운명을 개탄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을 닦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나라가 망한 후 일제가 주는 노인 은사금(恩賜金)을 거절하고 독립을 역설하다가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는 군산으로 압송 도중에 만경사창(萬頃沙倉)의 나룻물에 투신했으나 일제 헌병이 한사코 건져내었다. 군산감옥에 투옥되자 9일간 단식을 결행하여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영세불망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애민선정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터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한 구좌면 하도리 해녀들이 지역의 청년 지식인 교사들로부터 근대 민족교육을 받았던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 야학강습소 자리이다. 제주도의 대표적인 초기 여성운동가 김시숙(金時淑. 1880∼1933)은 여성의 몸으로 1925년 조천리에 여성야학소를 개설했다. 그녀는 여성문맹자들에게 항일 내용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당했다.1921년도에 설립된 사립 하도보통학교(현 하도초등학교)는 노동야학교육을 통해 항일의식을 키웠던 곳이다. 야학활동은 당시 혁우동맹 민중운동자협의회 회원 오문규, 김순종, 부승림 등 일부 하도보통학교 선생들이 담당했다. 제주해녀항일투항쟁이 하도리, 종달, 세화, 우도, 성산읍으로 확산되면서 2년여 넘게(1931∼32년)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들 신진 청년교사들의 이론적이고 조직적인 도움에 힘입은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