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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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선 묘
송병선(1836 - 1905)은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 순국지사이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동방일사(東方一士). 대전시 회덕(懷德) 출생.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며, 송면수(宋勉洙)의 맏아들로, 참의 송달수(宋達洙)와 송근수(宋近洙)의 종질이며, 송병순(宋秉珣)의 형이다. 큰아버지인 송달수에게서 송병순과 함께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동생 송병순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5년에 충청남도 대전 보문산으로 이전하였다.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곳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태수 구 묘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태수 사당(서강사)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태수 사적비
장태수(1841 - 1910)는 전라북도 김제(金堤)군 금구(金溝)면에서 태어났다. 186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예조정랑(禮曹正郞) 지평(持平) 정언(正言) 장령(掌令)을 역임했다. 1867년 양산군수(梁山郡守)로 임명되자 5천냥의 공금으로 양병(養兵)을 했고, 1872년에는 고종을 수행하여 송도(松都)에 다녀왔다. 병조참의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참찬관(經延參贊官)을 지내고, 1895년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여 사직했다. 그 후 중추원 의관을 거쳐 시종원 부경(侍從院副卿)에 올랐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한 후 일본헌병이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恩賜金)을 전달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 가고 그도 체포하려 하자 단식을 결행하여 선조의 묘에 죽음을 고하고 24일만에 절명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영상 순절비
김영상(1836 - 1911)은 조선 후기 일본 왕의 노인 은사금을 거절하여 수감 중 단식하여 순국한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김영상(金永相)은 183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김경흠과 나주오씨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6세에 고향인 정읍 칠보면 무성리 원촌으로 이사하여 18세에 인척인 김인흠, 23세에 김기에게 수학하고, 50세에 소휘면(蘇輝冕)의 제자가 되었으며, 기정진 · 송병선(宋秉璿) 등과도 교유하였다. 1911년 5월 9일 옥중에서 단식, 순국하였다. 김영상은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의 장리(掌理)로 있던 중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빼앗기자 70세의 고령임에도 최익현 · 임병찬 등과 함께 태인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06년 6월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총참모장이 되어 지역 유생들을 참여하게 하였다. 최익현이 대마도에서 순국하자 1907년 태산사(台山祠)를 건립하고 그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때 김영상은 유림들의 요청으로 태산사 상량문을 지었고 한동안 태산사에 머물렀다.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10월 노인들에게 은사금(恩賜金)을 주려 하자 “대한신민(大韓臣民)이 어찌 원수의 돈을 받겠는가.”라며 이를 수차례 거절하면서 사령장에 적힌 자신의 성명을 찢어버렸다고 한다. 이에 1911년 5월 일제가 일왕을 모독한 불경죄로 그를 체포하여 동곡헌병대에 구금하였다가 군산으로 압송할 때 만경강 사창진(沙瘡津)에서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나, 헌병이 그를 구출하여 실패하였다. 군산 감옥에 투옥된 그는 단식 끝에 76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45년 김환풍 · 안항섭 등이 발의하여 김영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인 필양사(泌陽祠)를 건립하였다(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51-1-19, 관리자: 필양사보존회). 1978년 지역 인사들이 김제 만경강 사창진에 「춘우정투수순절추모비(春雨亭投水殉節追慕碑)」를 건립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병로 집(생가)
김병로(1998 - 1964)의 호는 가인이며, 해방 이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 부장,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법조인이자 정치인이다. 유년시절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고, 13세에 담양 정씨(潭陽鄭氏)와 혼인하였다.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전우(田愚)에게 한학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 강습소)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1906년 창평(昌平)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했으며,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폐결핵으로 귀국했다. 1912년에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대학에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대학[中央大學]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에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냈고, 한편으로는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 京城法律專門學校의 전신)와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普成專門學校의 전신)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서 개업했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許憲) · 김용무(金用茂) · 김태영(金泰榮)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金相玉義士事件),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李商在)의 뒤를 이어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金性洙)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思想事件)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광복이 되면서 잠시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냈다. 1948년초대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이 되어 1957년 70세로 정년퇴임하였다. 정년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했으며, 1955년 고려대학교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 당의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尹潽善) · 허정(許政)과 함께 야당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작업 등 야당활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김근배 사당(매곡사) 터
김근배(1874 - 1910)의 자는 광원, 호는 매하이며, 조선 후기에 성균관박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866년 병인양요를 당하여 아직 약관의 나이로 토적의거격문(討賊義擧檄文)을 지어 상소하였다.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을 떨치다가,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여 청장년들에게 훈육을 통하여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뒤 헌병주재소장을 통하여 김근배를 회유하기 위한 은사금(恩賜金)을 보내자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하였으며, 앞으로 수없는 곤욕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죽음으로써 충절을 지키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우물에 투신, 순절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기 묘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병기 집
이병기(1892 - 1968)의 호는 가람이며,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시조 시인이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중인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웠다. 1913년부터 남양(南陽)·전주제2·여산(礪山)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1921년 권덕규(權悳奎)·임경재(任暻宰)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보았다. 1922년부터 동광고등보통학교·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조에 뜻을 두고, 1926년 ‘시조회(時調會)’를 발기하였다.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동분서주하였다. 6·25를 만나 1951년부터 전라북도 전시연합대학 교수, 전북대학교 문리대학장을 지내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1957년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제자복·화초복·술복이 있는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고 자처할 만큼 술과 시와 제자를 사랑한 훈훈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문학작품을 활자화한 것은 1920년 9월 『공제(共濟)』 1호에 발표한 「수레 뒤에서」이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산문시와 같은 것이었다. 그가 시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시조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의 그의 시조는 다분히 옛 것을 본받고 있었다. 그가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1926년 무렵이었다. 「시조란 무엇인가」(동아일보, 1926.11.24.∼12.13.)·「율격(律格)과 시조」(동아일보, 1928.11.28.∼12.1.)·「시조원류론(時調源流論)」(新生, 1929.1.∼5.)·「시조는 창(唱)이냐 작(作)이냐」(新民, 1930.1.)·「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1.23.∼2.4.)·「시조의 발생과 가곡과의 구분」(진단학보, 1934.11.) 등 20여 편의 시조론을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시조 혁신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기념비적 논문은 「시조는 혁신하자」였다. 이 무렵 『동아일보』의 시조모집 ‘고선(考選)’을 통하여 신인지도에 힘썼고,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에 조남령(曺南嶺)·오신혜(吳信惠)·김상옥(金相沃)·장응두(張應斗)·이호우(李鎬雨) 등 우수한 신인들을 추천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시조와 현대시를 동질로 보고 시조창(時調唱)으로부터의 분리, 시어의 조탁과 관념의 형상화, 연작(連作) 등을 주장하여 시조 혁신을 선도하면서 그 이론을 실천하여 1939년 『가람시조집(嘉藍時調集)』(문장사)을 출간하였다. 여기에 수록된 그의 전기 시조들은 「난초」로 대표되는 자연 관조와 「젖」에 나타난 인정물 등 순수서정 일변도였다. 그 뒤 옥중작인 「홍원저조(洪原低調)」 등에서 사회성이 다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은 6·25의 격동을 겪으면서 시작되어 사회적 관심이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주된 공적은 시조에서 이루어졌지만 서지학(書誌學)과 국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묻혀 있던 고전작품들, 「한중록」·「인현왕후전」·「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申在孝)의 ‘극가(劇歌)’ 즉 판소리 등을 발굴, 소개한 공로는 크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렬사
충렬사(忠烈詞)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구한말 5열사인 이준·안중근·백정기·이봉창·윤봉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제사는 매년 2월 25일 지방 유림들이 모여 지내고 있다. 이순신 장군[1545~1598]은 본관은 덕수, 시호는 충무공이다.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 옥포, 사천, 당포, 당항포, 한산도에서 왜선을 격파하였으며,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남해안 일대의 적의 수군을 몰아내었다. 1597년 백의종군하였으나 원균의 수군이 패배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명량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나 1598년 퇴각하는 왜군과 맞서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준 열사[1859~1907]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고종의 밀사로 참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자 울분한 나머지 분사(憤死)하였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다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피탈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백정기 열사[1896~1934]는 1910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33년 상하이의 육삼정에서 일본 요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이봉창 열사[1901~1932]는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윤봉길 열사[1908~1932]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전승축하 기념식이 열리자 식장에 참여하여 수류탄을 던져 일본군 대장 등 요인을 암살하고 사형을 당하였다. 익산 충렬사는 1958년 3월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주민 박필래가 윤리 정신 함양을 위해 유림 양용섭 등의 협력을 얻어 건립하였다. 매년 9월 초정일에 지역 내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사당과 강당, 담장이 있었으나 2019년 현재는 사당과 담장만 남아 있다.
조희제 구 묘
조희제(1873 - 1939)의 자는 운경, 호는 염재이며, 일제강점기 『염재문집초고』를 저술한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송병선(宋秉璿)·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대성하였다. 그 뒤 우국지사 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김병주(金炳周) 등과 도의로 교유하면서 격변하는 시국에 대하여 강개(慷慨)한 뜻을 품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분을 참지 못하고 한말 사변의 전말과 또는 절의(節義)를 세운 의열사(義烈士)·의병들의 실적(實蹟)과 문헌을 수집, 『염재야록(念齋野錄)』을 편찬하였다. 평생 정력을 다하여 집필한 그 비사(秘史)가 1938년 11월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임실경찰서에서 10여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당시 그 『염재야록』에 서문을 쓴 최병심, 발문을 쓴 이병은, 교정을 본 김영한(金寗漢), 서역을 맡은 조현수(趙顯洙) 이외에 많은 가담인사들까지도 모두 구속되는 한편, 본인 및 그 아버지의 문집초고 등도 모조리 압수당하였다. 울분이 쌓여 병이 나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또 체발(剃髮)을 강요당하자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구차히 사는 것보다는 차리리 대의를 지켜 죽음을 맹세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효행이 독실하였다. 저서로는 『염재문집초고(念齋文集草稿)』 8권이 있었으나 압수되었고 편저로는 『염재야록』 6권 2책이 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정인승 기념관
정인승 기념관은 선생이 태어나신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 생가터에 2005년 10월 준공하였으며, 전시실에는 유품과 우리말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고,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 정인승(1897 - 1986)의 호는 건재이며, 해방 이후 『표준중등말본』, 『표준고등말본』 등을 저술한 국어학자이다. 1925년 3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였으며, 1962년 중앙대학교에서, 1975년 연세대학교에서 각각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4월부터 1935년 8월까지 전라북도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6년 9월부터 1957년 10월까지 한글학회 『큰사전』(전 6권) 편찬을 주재하여 완간하였다. 사전 편찬 중이던 1942년 10월 1일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붙잡혀 2년의 실형선고를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광복으로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그 뒤 1952년 4월부터 1954년 4월까지 전북대학교 교수 및 총장직무대리, 1952년 4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중앙대학교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교무처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2월부터 그 해 9월까지 전북대학교 총장, 1964년 3월부터 1984년 8월까지 건국대학교 교수 및 대우교수로 재직하였다. 1966∼1981년까지 학술원 회원(국어학), 1981∼1986년까지 학술원 원로회원, 1974∼1986년까지 한글학회 명예이사(학술)를 지냈다. 포상관계로는 『큰사전』편찬공로상(1957)·국어운동특별공로상(1957)·학술원공로상(1959)·건국공로훈장(1962)·국민훈장 모란장(1970)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표준중등말본』(을유문화사, 1949)·『표준중등말본』(신구문화사, 1956)·『표준고등말본』(신구문화사, 1956) 등 10여 권이 있으며, 국어학관계의 논문으로 「사전편찬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한글』 36, 1936)·「모음상대법칙과 자음가세법칙」(『한글』 60, 1938) 등 10여 편이 있다. 그 밖의 글로 「눈의 글과 귀의 글」 등 40여 편이 있다. 문법관계에 있어 ‘이다’를 풀이자리토씨[敍述格助詞]로 처리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