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이희승 묘
이희승(1897 - 1989)는 경기도 개풍(開豊) 사람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선기 묘
김선기(1907-1992)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으로,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 및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발표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표준말 사정〉과 〈외래어 표기법 사정〉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 강습회의 강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들에게 국어를 교육하였고, 193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협회 대회에서 한국어의 조직을 과학적으로 소개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수원의 삼일학교는 1903년 수원 출신 애국지사이자 기독교인인 이하영(李夏榮), 임면수(林冕洙)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당시 수원군 보시동 북감리교회에서 문을 연 매일학교가 삼일학교의 전신이다. 삼일학교는 만세운동 이전인 1915년 삼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아담스 기념관은 1923년 삼일학교의 새 교사로 지어졌다. 삼일학교라는 교명은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를 뜻하고 아담스(Adams)는 삼일학교 신축 교사를 지으라고 헌금을 모아 보내준 미국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삼일이 기미년의 3·1운동을 계속 연상시킨다는 사유로 1938년 결국 팔달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당시 교무주임 유부영(柳富榮) 선생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강제 징용되었고, 돌아오지 못했다. 삼일이라는 학교 이름은 해방 후 1946년이 되어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담스 기념관은 중국인 시공 책임자인 왕영덕의 감독 아래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아담스 기념관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전쟁 당시 아담스 기념관은 네덜란드 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담스 기념관은 현재도 도서열람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도기념물 제 175호로 지정되어있다.
조병세 구 묘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철종 10년(1859)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 좌의장 등을 역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재 신도비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일제강점기에 YMCA 전국연합회 회장이자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위원회 위원장, 보이스카우트 총재, 민족유일당 운동인 신간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옥중에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고 그때부터 기독교적인 삶을 평생 실천하였다. 1927년 3월 29일 노환으로 서거하였으며,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재 묘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 운동에 전념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연맹의 전신)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썼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3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홍만식 묘
홍만식(1842 - 1905)은 1866년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있을 때인 1884년 아우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 부친과 그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고 다음 해에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으며, 1895년 8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독자결코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해주관찰사를 비롯한 의정부 찬정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의 세 자만을 썼으며, 나라의 기울어져 감을 통탄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 자결 순국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홍만식의 묘이다.
홍만식 영세불망비
홍만식(1842 - 1905)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초대 우정국 총판을 지낸 홍영식의 형으로, 1866년(고종 3)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하여, 수찬(修撰)과 검열(檢閱)을 지내고 여주 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여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용인독립운동유적(민영환 묘, 신도비)
충정공 민영환(1861 - 1905)이 안장된 묘역으로, 그는 당시 최고 세도가였던 여흥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도승지·형조판서·한성부윤 등 요직을 맡았다. 이후 1897년 특명전권공사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당시 여러 열강을 방문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이후 독립협회 후원 및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파직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고,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용인독립운동유적(유근 묘)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1861 - 12921) 선생은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관료들을 지면을 통해 비판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민회에서 역시 활동했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강제합병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에는 언론계 원로로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유근 추모비
유근(1861 - 1921)은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할 때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다가 장지연 선생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자 선생이 후반부를 마무리짓고 신문을 인쇄함으로써 한국언론사에 빛나는 논설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1907년 황성신문 5대 사장으로 취임, 경술국치 직전까지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노력했다. 1915년 중앙학교장에 취임,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을 지원하다 배후자로 체포돼 곤욕을 치렀으며, 3·1운동 때는 한성정부를 수립하는데 「13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 창간을 발의하면서 「동아일보」라는 제호를 짓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관준 순교추모비
박관준(1874 - 1945)은 평안남도 개천(价川) 사람으로, 기독교의 장로였으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였다. 193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회에서 「동아대국교개종헌의서(東亞大國敎改宗獻議書)」를 살포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후에도 신사참배 거부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예심중에 병이 사경(死境)에 이르자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2월 15일 별세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