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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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각자
이범진(1852~1911)은 함경남도 사람이다. 그는 18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서 1887년에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농상공부대신서리가 되어 친로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친로파로 지목되어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에 춘생문사건을 일으키는데 주역이 되었다가 실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였다. 이범진은 을사조약에 통분하여 일제의 소환에 불응하고 양국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계속 러시아 수도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1907년에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밀사로서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이 러시아 수도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로 임원 겸 통역으로 동반케 했으며,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으면서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케 하고, 러시아 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 밀사 파견과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08년에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내었으며, 1909년에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계동학교(啓東學校), 세동학교(世東學校), 신동학교(新東學校)를 통합하여 큰 규모의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설립할 때에도 1천 루블을 보내어 교포들의 교육 구국운동을 지원하였다.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휴대한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여수 구 청년회관
여수지방 항일 구국운동의 근거지로서, 일제 강점기에 여수 청년들이 조직 한 사회운동 단체 '맞돕회'가 건립한 '청년회관' 건물이다. '맞돕회'는 일제 강점기에 서울에서 유학하다가 3.1운동 때에 퇴학을 당하여 고향에 온 학생들이 1921년에 김백평을 중심으로 만든 단체로, 단체의 이름은 이름은 청년들이 '맞잡고 돕고 살자'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이 건물은 '맞돕회'가 '덕지'라는 저수지를 구입하여 메우고, 당시 우편국으로 사용하던 진남관 왼쪽 건물의 철거현장에서 건축 자재를 마련한 다음, 천일화학 김영준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이다. 이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1층 건물 위에 전통 건축물을 앉힌 독특한 모습으로, 여느 전통 건축물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한 전통 건축물의 자재를 활용하여 지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지역의 항일운동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영광 중등교육 발원지 민립학교 기념비
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영광지역의 선각자들은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발족하고 10월 15일에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교정에 자리했던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정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영광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1910~1998)는 전답 9만여 평과 벼 1천 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 교육을 보살폈다.
영광민립학교 교가비
본 사적은 영광민립학교의 교가를 적어놓은 비석이다.1945년 조국의 광복과 함께 영광지역의 선각자들은 정주연학회(靜州硏學會)를 발족하고 10월 15일에 영광민립고등중학교와 영광민립여자고등중학교를 개교하였다. 민립고등중학교는 영광중학교와 영광고등학교로 성정하고 고등학교는 종합고, 실업고, 공업고등학교로 발전하였다. 한편, 민립여자고등중학교는 영광여자중학교와 영광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민립학교를 건립할 때 이을호(1910~1998)는 전답 9만여 평과 벼 1천 섬을 출연하여 학교를 열게 하였고 1969년에도 논밭과 임야 6천여 평을 기증하여 후세 교육을 보살폈다.
김준연 유적지
김준연(1895~1971)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한문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11월 여운형(呂運亨)의 도일(渡日) 때에는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였다. 귀국하여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6년 12월에 안광천(安光泉)·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세칭 ML당이라고 부르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재조직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이 되고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8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이른바 ML당 사건이라고 부르는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 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 8월에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 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게 되자 주필이던 그는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간부로 그리고 역대 민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충의숭모단
1905년 11월 을사조약 강제 체결되자 이곳에 애국유림을 모아 일제를 규탄하고, 1910년 08월 한일합방이 되자 지방 애국 유림이 모여 주권회복을 외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광무황제를 향해 방성대곡 한 곳이다. 또한, 1919년 01월 고종(광무황제)이 일인에 의한 독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축단하고 인산(국장)일까지 902일 산통곡 북향을 한 곳이며, 1926년 04월 순종(융회황제)이 승하하자 이곳에 융희황제 숭모단향비를 같은 자리 왼쪽에 세우고 함께 향사한 곳으로서 나라에 대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반하경 구 묘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坡州)군 교하(交河)면에 은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유서를 남기고 대로에서 할복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순기,변진설 독립운동 근거지(영사정)
본래 이름은 산정(山亭)이었으며, 1930년경 황주변씨 후손들이 중건하면서 선현을 사모하는 뜻에서 永思亭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변순기선생 기적비에 3.1독립만세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후 '장남 변진설이 광주고보학생운동의 주모자로 앞장 섬에 선생은 이를 적극 지원하여 민중대회까지 벌였으나 진설은 결국 체포되어 징역 6월에 4년 집행유예를 받았으니 그는 나와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입산하여 승려가 되고 말았다. 출옥한 후 1921년부터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서 전남학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가 창립되자 적극 가담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안리 입구에 있는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변진설은 출가하여 법명 월주가 된 그는 백양사에서 송만암스님에게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하여 화엄사에서 당대의 불교학의 대가였던 진진응 스님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1939년 독립선언문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받았다.
송주면 순절비
송주면(1856 - 1910)의 자는 정여, 호는 규사이며, 대한제국기 중추원의관을 역임한 문신이자 지사이다. 1905년 10월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여 정3품의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직에서 사퇴하였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했다는 비보를 듣고서 ‘우리의 구강(舊疆)을 내놓아라.’라는 요지의 혈서를 통감부에 보내고, 절명시(絶命詩) 5수를 유서로 남긴 다음, 자손들에게 효우(孝友)할 것을 당부하고 음독자살하려다가 집안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밤을 이용하여 우물에 투신하여 54세를 일기로 순절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인승 민족정신 선양비
정인승(1897 ~ 1986)은 전라북도 장수(長水) 사람이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후 독립의 길이 국어국문의 수호와 발전에 있다고 생각하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가입하여 사전편찬회의 주무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어의 보급과 한국문의 출판을 일체 금지하여 한국어말살정책을 야수적으로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여 탄압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사당(덕산사)
백정기(1896~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병선 서원(낙영당)
낙송병선(1836 - 1905)의 자는 화옥, 호는 동방일사, 연재, 시호는 문충이며, 대한제국기 『연재집』, 『근사속록』, 『패동연원록』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순국지사이다. 1877년(고종 14) 태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경연관(經筵官)·서연관(書筵官)·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 등에 차례로 선임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80년 철인왕후(哲仁王后)가 죽자, 왕대비와 대왕대비는 소공시마복(小功緦麻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는 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당시 개선할 시무책 8개조를 건의한 신사봉사(辛巳封事)를 올렸다. 1883년과 1884년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다만 1884년 의제변개(衣制變改)가 단행되자 극력 반대하는 소를 두 차례 올렸다. 그러나 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몸과 마음을 닦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이듬해에는 무주 설천면 구천동 산 속 물가에 서벽정(棲碧亭)을 짓고 도학을 강론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조정에서 다시 가의(嘉義)로 승품하였으나 역시 응하지 않고 다만 사교(邪敎)를 금지할 것을 상소하였다. 1904년 명헌태후(明憲太后) 홍씨와 황태자비 순명비(純明妃)가 죽자 그 복상(服喪)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두 차례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렸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답이 없자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렸다. 을사오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납치되어 대전으로 호송되었다.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유서를 남겨 놓고 세 차례에 걸쳐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유서에서 을사오적 처형, 을사조약 파기 및 의(義)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송병선이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칭송하였다. 죽은 뒤 의정(議政)에 추증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