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황현 사당(매천사), 황현 순절지(대월헌)
매천 황현 선생은 장수(長水) 본관이며 운경(雲卿) 자와 매천(梅泉)이란 호를 가진다.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자랐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시문에 능했다.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4편의 저작과 함께 남겼다.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고, 이듬해 <매천집>과 <매천야록>이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되었다
호양학교 복원기념비
지리산 주령인 '호양맥'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양학교는 1908년 구례출신 학자 천사 왕석보(1816~1868) 선생의 후학인 현곡 박태현 선생(1856~1925)이나 매천 선생 등 민족 지도자들과 전남 구례군 광의면 주민 200여명이 민족자각 운동의 일환으로 뜻을 모아 만든 학교이다. 교사 6명이 12년 동안 학생 100여 명에게 지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호양학교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폐교되었고, 주민들은 광복 다음해인 1946년 호양학교의 후신인 방광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양용환 기념비
양용환(1904~1943)은 전라남도 구례(求禮) 사람이다. 1937년 3월에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로 취임하여 전라남도 구례에서 기독교 신도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키고 일제의 궁성요배(宮城遙拜)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를 거부하도록 설교하였다. 1940년 2월 전라남도 고흥(高興)군 포두(浦頭)면 송산교회(松山敎會)에서 개최한 고흥연합사경회(高興聯合査經會)에서 다수의 신도들에게 예수 재림 때 우상을 숭배한 자에게는 십계명위배로 벌을 받을 것이라는 요지로서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적극 거부할 것을 권유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2년 9월 30일 이로 인하여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진우 기념관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진우 추모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진우 추모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진우 추모시비
고하 송진우(1890 ~ 1945)는 전남 담양 사람이다. 1900년대 초 창평의 영학숙에서 인촌 김성수와 함께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메이지대를 수학한 다음 서울의 중앙학교 교장에 취임, 민족교육을 통해 수많은 애국청년을 배출하였다. 이후 3.1운동에 가담 조선민립대학 건립참여,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등 교육과 언론을 통해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주도하면서 민족분열방지에 진력하다가 애석하게 불의의 흉탄에 서거하였다. 1963년 3월 1일 사민주의의 일관된 삶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사적지 표지석
신간회 목포지회 활동의 터전(목포청년회관)으로서 1927년 6월 18일 설립된 일제 강점하 국내 최대 항일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의 목포지회가 활동한 곳이다. 신간회는 1927년에 민족주의 운동가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독립의 뜻을 모아 만든 사회단체이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합법적인 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일제의 탄압과 조직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1931년에 해체되었다. 그 중에서 목포지회는 강연회․정기대회.시민대회 추진, 하의도 농민운동 지원, 재만동포 탄압 규탄 등을 통해 항일 의식 고취와 민족협동전선 형성에 힘썼다.
서재필 기념공원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서재필 집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양정원터 기념비
양정원터는 학산(學山) 윤승원(尹承遠) 선생은 1939년 4월 12일 이곳에 민족, 자주교육의 요람인 양정원을 세워 일본 관헌의 갖은 박해와 억압을 무릅쓰고 우리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며 신사참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병들고 생활이 어려운 주민들에게 무료 진료와 의약품을 나누어 주었으며, 흉년에는 해조류를 식량 대용으로 나누어 주어 고통을 같이 하였다. 야학의 문도 활짝 연 이 양정원의 민족 교육은 초등에서 중등과정의 의무 교육으로 우리 민족사와 교육사에 큰 뜻을 가지고 있다. 보성, 장흥, 강진, 영암, 완도, 고흥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배출된 인재는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 민족교육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250여 명의 재학생을 기반으로 양정원이 모태가 되어 1947년 4월 24일 보성 회천에서 국민학교가 설립되었다.
정해룡 추모비
정해룡(丁海龍, 1913~1969)은 1913년 7월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서 영성 정씨 종갓집의 종손으로 태어난다. 그의 집안은 봉강리에서 13대가 살아온 종가로 천석꾼 부자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정해룡은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거액을 기부하고, 양정원을 설립해 인재 양성을 하고, 독립자금을 만주에 전달하였다. 1934년에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인쇄소인 ‘보성인쇄소’를 차려 전남 지역 민족주의자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한편, 그는 구국에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교육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37년 그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민족 교육을 위해 보성전문학교 도서관 건립에 여러 차례 거액을 기부한다. 1938년 정해룡은 고향에 책과 학용품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는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을 설립한다. 윤윤기에게 양정원을 운영하게 하고, 회천면 주민 교육에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제수 전예준도 폐교될 때까지 양정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42년 독립운동을 위해 울산 달천철장을 인수해 운영하고, 1944년에는 무장투쟁 단체를 만나러 만주에 다녀오다가 체포돼 4개월 간 옥고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