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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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학덕 추모비
이희승(李熙昇, 1896년 6월 9일 ~ 1989년 11월 27일)은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시인, 수필가이다. 자(字)는 성세(聖世), 호(號)는 일석(一石),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양정학원 유허비
양정학원은 일제강점기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거리에 있던 사립 근대 학교로, 신지식 함양, 애국·애족·애향심 함양, 건전한 개척 정신 함양 등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양정학원(養正學院)은 언양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인과 언양 지역 유지들이 설립하였다. 1920년에 천도교인 김교경(金敎慶), 이규천(李圭千) 등과 지역 유지 대표 등이 근대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과 3.1운동 이후 천도교단 조직 재정비의 목적으로 일제 당국과 교섭하여 사설 학습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장소는 3.1만세운동으로 폐쇄당한 상북면 거리(巨里)의 천도교회관이었는데, 1921년 3월에 33.06㎡[약 10평] 남짓한 교실 2칸과 관리실 1칸으로 양정학원의 현판을 걸었다. 양정학원의 운영을 맡은 사람은 이규천이었고, 교사는 휘문의숙(徽文義塾)과 보성중학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이규장(李圭章)과 이무종(李武鐘)이었다. 학교 설립 자금은 지역 유지가 부담하고 운영은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4년제 보통학교 과정으로 서당 교육을 마친 학생들에게 산술과 역사, 조선어, 지리와 한문 등을 가르쳤다. 양정학원은 지역 유지의 기부금 5,000여 원을 기본금으로 적립한 후 적립금에서 생기는 이자와 약간의 수업료로 8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7년 4월 1일에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 길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양정학원은 통합 폐쇄되었다.
최현배 집, 외솔기념관
최현배(1894 - 1970)는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0년 5월부터 3년간 매주 일요일에 개최한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배우고 독립사상을 고취받았다. 1925년에 일본 경도(京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졸업하고, 1926년 동 대학원에 수학하는 중에 「조선민족갱생(更生)의 도(道)」를 저술하였다. 이 저서에서 한국민족이 다시 독립하는 방도가 다각적으로 연구되었다. 1926년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어 1937년까지 재직하다가 1938년 2월에 안재홍(安在鴻) 등 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단체인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의 독립사상 고취운동으로 일시 구속되어 조사를 받고 연희전문 교수직에서 강제 해직되었다. 그 사이에 한글 연구에 정진하여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에 가입해서 1929년 107명으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에 참가했으며, 1934년 4월에 「중등 조선말본」을 간행하였다. 또한 흥업구락부 운동으로 실직된 기간에 한글연구에 더욱 집중하여 1941년에 그의 대표작 「한글갈」을 완성해서 간행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탄압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16일 징역 4년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했으나 실질적으로 3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 한글학회 이사장,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교수와 부총장, 학술원 회원, 학술원 부회장 겸 종신회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글 연구와 한글 전용운동에 전념했으며, 한글 가로글씨의 실험과 한글기계화 운동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울산청년회관, 신간회 울산지회
1920년 2월 창립된 울산청년회는 강연회 등 각종 사업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였다. 이에 회원들의 회비와 지역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총 공사비 6,400여 원을 들여 울산청년회관을 건립하였다. 울산청년회 각 부의 선전 유인물과 신문이 발행되어 1921년 11월 27일 거행된 낙성식에서 배포되었으며, 회관 낙성을 축하하는 가장행렬과 제등행렬이 밤까지 이어졌다. 울산청년회관은 건립 당시 울산공립보통학교 뒷편 언덕에 위치하였다. 2중의 녹색 출입문이 있었으며 화려한 장식을 한 서양식 건물이었다. 건물 바깥에는 실외 행사를 위한 정원도 있었다. 1921년 조선청년연합회 순회강연단이 울산을 방문하여 신축한 울산청년회관에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800여 명의 청중이 관내와 관외 정원에 들어찼다는 기록을 통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울산청년회관 터는 기획재정부가 관리하는 국유지로 부지 면적은 1,042㎡이다. 현재 울산청년회관 터에는 1971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들의 성금으로 지은 삼일회관이 있다. 삼일회관에는 울산향토문화연구회와 대한민국건국회가 입주해 있다. 일제강점기에 울산청년회관은 신간회 울산지회, 울산청년동맹 등 여러 단체의 창립대회와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각종 강연회, 무도회, 공연 등이 개최되었으며 울산 최초의 중등교육기관이었던 해영학원과 노동야학의 교사(校舍)로도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대로 된 실내 행사장이 없었던 울산 지역에서 울산청년회관은 각종 사회 운동과 문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1921년 3월에 울산청년회관이, 1928년 3월에는 신간회 울산지회가 설립된 곳이다. 이곳에서 울산청년회는 각종 강연회·강습·토론회를 열며 민족 계몽활동과 회원교육을 시행하였다. 신간회는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으로 일제강점기 가장 큰 합법적 결사 단체였다.
장면 집(운석의 터)
장면(1899 - 1966)은 일제강점기에 교육과 문화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며, 광복 후에는 건국에 기여했고 해방 이후 국무총리, 부통령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출생지는 서울, 출신지는 인천. 해방 이후에 부산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張箕彬)의 아들이다.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톨릭교 평양교구(平壤敎區)와 서울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주미대사를 거쳐,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후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기도 했다. 4·19 이후 의원내각제인 2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1956년에는 대통령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 해 9월 민주당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 홀대학에서 다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9년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이기붕(李起鵬)자유당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의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의원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新民黨)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정권의 정치정화법에 묶여 연금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사건인 반혁명음모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1951년로마 교황청비오12세로부터 성신베스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금릉학교
사립금릉학교(私立金陵學校)는 1906년 강진 유지들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1907년 4월 1일 현재 금서당(琴書堂) 자리에서 개교하였고, 1911년 6월 강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4년 4월 현재 해남세무서 강진지서(강진읍 남성리 108-2) 위치로 이전하였고, 1923년 4월 1일 현재 강진중앙초등학교 위치(강진읍 평동리 235)로 이전하였다. 개교 당시 강진 군수인 조중관이 교장, 조병균이 교감이었고, 이듬해는 방규석이 잠시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설립 직후 학생이 100여 명에 이를 만큼 발전하여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특히 1907년에는 전국에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금릉학교에서도 국채보상금릉협성회를 조직하고 모금하여 1차로 1백환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였으며, 당시 『황성신문』에 성금을 낸 교사와 학생들의 명단이 실리기도 하였다. 1919년 강진읍 3·1운동 때 김윤식(김영랑)을 비롯한 이 학교 출신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완계정사(안훈서당)
완계정사는 안훈(1881~1958) 선생이 건립한 전통 양식의 서당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기를 함께한 작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곳을 통해 수천 명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면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시대에는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면서 단발령과 창씨개명 등의 정책도 결연히 반대하고 1941년 의병장의 추모비 축조를 계획하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으며, 선생의 고귀한 독립정신의 얼을 계승하고자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사 적지'로 지정하였다. 안자정(안훈, 1881~1958)은 전북 곡성(谷城) 사람이다. 이석용(李錫庸)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비밀조직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남원지역(南原地域)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였고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석용은 1907년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구성하자 종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의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창의동맹(義兵倡義同盟)'을 결성하고 전해산(全海山) 등을 참모로 기용하고 전북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수차려 교전 끝에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1909년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 후 1911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구성하고 군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안자정은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동밀맹단에 1911년에 목화(木花) 20근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여 임자동밀맹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향리에서 완계정사(浣溪精舍)에서 후학교육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재건 집
장재건(1843-1910) 선생은 18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과 지평(持平)을 지내었다. 1894년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학문을 닦던 중 1909년 옥과향교(鄕校)를 폐쇄 시키려 하자, 철거반을 향해 강력하게 반대하여 향교를 보존시킬 수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황현 추모비
매천 황현 선생은 장수(長水) 본관이며 운경(雲卿) 자와 매천(梅泉)이란 호를 가진다. 황현 선생은 1855년 전라남도 광양 출생으로, 세종 때 명재상으로 덕망 높은 황희 정승의 후손으로 자랐다. 왕석보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시문에 능했다. 이후 서울에서 살다가 벼슬을 포기하고 전라남도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4편의 저작과 함께 남겼다. 1910년 8월 음독 자결하였고, 이듬해 <매천집>과 <매천야록>이 발간되어 한말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되었다
이병기 시비
이병기(1892-1968)는 전라북도 익산 출신으로 1927년 2월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정열모(鄭烈模)·신명균(申明均) 등과 같이 "한글사(社)"를 조직하고 월간 잡지 "한글"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연구회가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되어 사전편찬의 일을 추진하였다. 또한 1920년대 전반에 걸쳐서 민족(국민)문학의 부흥을 주장하고, 고유한 민족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時調)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30년에는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동아일보사의 지원으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확대 개편)의 전국 순회 조선어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하여 1천 6백명의 지도층 청년들에게 한글 강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4년 5월에는 민족문화와 국사·국어국문 등 국학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어학회가 조직한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황현 묘(매천역사공원)
황현(1855-1910)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강 위(姜 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에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 황 현의 글이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황 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 청국의 적극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에서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 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 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황 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서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중국에의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내용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현 집
황현(1855-1910)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려고 서울에 와서 문장으로 이름이 높던 강 위(姜 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에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초장에 황 현의 글이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황 현이 시골 출신임을 알고 둘째로 내려놓으니 조정의 부패를 절감하고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은 채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에 부친의 명을 어기지 못하여 다시 상경해서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당시 나라의 형편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에 청국의 적극간섭정책 하에서 수구파 정권의 가렴주구와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다시 귀향하였다. 그는 구례에서 조그만 서재를 마련하여 3천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두문불출한 채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황 현은 이 때 시문뿐만 아니라 역사연구에도 몰두했으며, 경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라의 정세는 풍운이 급박하여 1894년에는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경장이 연이어 일어났다. 황 현은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기록과 귀감을 남겨 주기 위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紀聞)』을 써서 자기의 경험한 바와 견문한 바를 1910년 순절 할 때까지 비평록으로 저술하였다. 1905년 11월 일본제국주의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황 현은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 있는 친우 김택영을 만나서 그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중국에의 망명이 실패하자 집에다 중국역대의 난세에 깨끗이 처신한 처사(處士) 열 사람의 행적을 시와 그림으로 그려서 열 폭 병풍을 만들어 둘러치고 다시 이전과 같이 두문불출한 채 비평록을 쓰면서 칩거하였다. 이 때 쓴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내용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상을 그때마다 낱낱이 기록하고 일제에 추종하여 나라를 판 매국노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하여 준렬하게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그는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首)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