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정인보 집
정인보(1893~1950)는 서울의 동래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한학자이다. 당대 양명학의 대가 중 한명인 이건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한일합당 직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학과 역사학을 가르쳤으며,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신민족주의 역사가의 대표민물로서 우리 민족의 고전을 널리 알리는 데에 노력했으며, 1930년대에는 조선학운동을 일으키면서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동리에 은거했다. 1947년 국학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자 사임하고 국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6.25전쟁 때에 북한국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진우 집
송진우(1887 - 1945)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1916년에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감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김성수 · 현상윤(玄相允) · 최린(崔麟)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고 양교계의 행동통일이 이룩되어 3 · 1운동으로 결실되었다. 3 · 1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적용법조문 관계로 무죄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으나 사실상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 · 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벌인 데 이어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제창, 추진하였으며, 1923년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순회하여 위문금품의 모집운동을 개시하였다.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 이해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에 취임하고 다음해에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5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한 뒤,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설을 12회에 걸쳐 집필, 연재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낸 3 · 1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정인보(鄭寅普)와 유칙(遺勅)주1의 작성을 획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다음해 2월 일본의 새로운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특사로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김성수의 뒤를 이어 다시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제3회 범태평양회의가 일본 경도(京都)에서 개최되어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기념축사 관계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 해 9월에 속간하였다. 1931년 4월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모금으로 아산 현충사를 중수하였다. 1931년부터 4년간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위하여 하기 방학에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이 사건이 일본의 한중이간책(韓中離間策)임을 사설로 논파하여 한중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며, 또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사업을 전개하여 뒷날 장개석(蔣介石) 국민정부주석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았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6년간의 준비 끝에 마련한 새 철자법에 의한 활자를 사용하는 등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힘썼다. 1934년 『동아일보』의 사설로써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 지지하여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 1936년 8월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다음해 6월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고문에 취임하였으나, 1939년 12월 총독부로부터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귀국 도중 피검, 구속되어 다시 폐간을 강요받아 같은 해 8월에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며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드러누웠다. 1943년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가 해체되고, 동본사(東本社)가 설립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元世勳), 장덕수(張德秀), 서상일(徐相日)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월 1일 『동김병로 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창동 3사자 동상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탄압을 피해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로 피난하였다. 가인 김병로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고하 송진우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 위당 정인보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733-4번지에 거주하였다. 사람들은 도봉구에 은둔한 세 위인을 일컬어 '창동3사자'라 칭하였다. 도봉구는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창동 3사자의 재조명 및 구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창동 3사자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2016년부터 추진하여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김병로 집 터
김병로(1887 - 1964)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관련한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이다.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이고 호는 가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를 찾아온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였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 · 김용무 · 김태영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의 뒤를 이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주시경 구 묘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만식 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이고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죽은 이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
한글학회 창립지 표지석
1908년 8월 31일 한힌샘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 말과 우리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만들었다. 우리 얼,말,글을 지키고 널리 펴려는 선각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연구 모임인 국어연구학회가 개화의 요람기에 봉원사에서 창립 총회를 열게 됨으로써 배달말글몯음(1911)→한글모(1913)→조선어연구회(1921)→조선어학회(1931)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 한글학회(1949)의 터전이 되었다. 봉원사는 우리 말,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1908년 8월 31일 국어연구학회(지금의 한글학회)가 창립총회를 연 곳으로 그 높은 뜻을 길이 남기고자 세운 표지석이다.
민영환 동상
민영환(1861 - 1905)은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집안 출신으로 예조판서, 병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낸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지사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후 국가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시도하였고,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판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한일협약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5년 11월 종로 이완식(李完植)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서재필 동상
서재필(1864~1951)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보성(寶城)에서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살 때 상경, 양외숙인 김성근(根)의 집에서 공부하였으며 1882년 급제(及第)하여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 벼슬에 올랐다. 1883년 일본 동경의 육군 호산(戸山)학교에 유학하고 1884년 귀국 후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과 갑신개혁(甲申改革)을 주도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다. 그러나 개혁의 실패로 부모, 형,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참형(慘刑)되었으며 어린 아들은 굶어죽는 참변(慘變)을 겪었다. 선생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여 지금의 워싱턴 대학에서 의학(學)을 공부,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醫師)가 되었다. 1895년 귀국하여 1896년 중추원(中樞院) 고문(顧問)에 임명되었고, 4월 7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하고 굴욕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獨立門)을 건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정신을 고취하였다. 1898년 국내 수구파(守舊派)들의 반대로 다시 미국으로 떠나 문구 및 인쇄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전해듣고 한인회의 개최 및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임시정부(臨時政府)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 위원장을 맡는 등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바쳤다. 그 후 성요셉병원 등에서 임상병리학자로 명성을 떨치다 1947년 미군정의 최고 고문이자 과도정부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으로 귀국하여 통일된 민주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국민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으나 정쟁에 휘말린 시국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1월 5일 8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그가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항일 방송운동 물망비
본 사적은 일제 강점기 항일의거사건인 "단파방송연락운동"으로 인해 1942~1943년 사이에 연행 투옥되어 獄死(옥사)한 6명 등 고초를 당한 수많은 선배 방송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후배 방송인들이 건립하였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2차대전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조선인들의 이름과 말과 글마저도 말살하려는 그들의 단말마적인 탄압이 극심하던 무렵, 방송계의 선각자들은 해외(海外)에서 보내오는 단파(短波)방송을 수신, 청취함으로써 국내외의 애국지사들과 연결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을 5년여에 걸쳐서 계속하였다. 그 사실이 탄로됨에 따라 1942년 12월 8일부터 전국에서 삼백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그중 옥사 6명, 수형자 56명이라는 뼈아픈 역사를 남겼다. 이에 그들의 애국심을 기리며 그 어느 누구도 자유민의 귀를 막을 수 없는 진리를 잊지 않고자 본 비가 여의도 KBS 본관 앞에 건립되었다.
조만식 어록비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이고 평안남도 강서 출신이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유발(죽은 이의 머리카락)이 안장되었다.
이상재 집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 운동에 전념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연맹의 전신)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썼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3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