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구찬회 집
구찬회(1890 - 1910)는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만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독립투사로부터 국내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과 기타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받아 국내 유지들에게 살포하고 그 자신이 자필로 이를 복사하여 배포하다가 1909년 12월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일제로부터 배후인물을 대라는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악형을 받다가 1910년 5월 13일 서울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서상돈 송덕비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수성못 상화동산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상돈 묘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상화 집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상화 시비, 약력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상돈 집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상돈 상
서상돈(1850 -1913)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國債補償運動)을 주도하였다. 서상돈은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내정문제로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수구파에 의해 해산되자, 그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와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의 특별회에서, 서상돈은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때 서상돈은 전체 인구 2,000만명이 담배를 끊어 그 돈을 모으면 부채를 모두 갚을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렇듯 금연운동에서 비롯한 국채보상운동의 움직임은 서울의「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後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國債志願金 收合事務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농간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지(교남 YMCA회관)
신간회 대구지회 활동 사적지 표지석은 신간회 대구지회가 활동한 곳을 알리는 사적이며, 교남 YMCA 경북서원 앞에 표지석이 위치하여 있는데, 교남 YMCA 건물은 대구3.1만세운동기념관이 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9월 3일 건립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의 항일민족 운동단체로,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전개 등의 활동을 목표로 하는데, 신간회 대구지회도 이에 따라 활동하였다. 구체적으로 신간회 대구지회는 강연회와 사강강좌, 노동야학 운영, 재만동포 폭압 규탄, 영남친목회, 경제연구회 반대 등을 통해 항일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협동전선 형성에 힘썼다.
이상화 시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국채보상운동 여성 기념비는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 참여의 기폭제가 됐던 대구 남일동 7부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애국계몽단체인 대구 광문회(회장 김광제)에서 서상돈 선생이 건의함으로써 첫 횃불이 올랐다. 2월 21일 북후정에서 열린 '국채보상 대구군민대회'에는 수많은 시민이 다투어 참가했는데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은 눈부셨다. 여학생은 물론 가정의 부인에서 기생에 이르기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성 못지않게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서도 남일동 7부인회는 비녀와 반지를 뽑고 깊이 숨겨두었던 보석을 국채보상금으로 헌납함으로써 그 후 수많은 여성들이 그 뒤를 따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이름 없는 걸인으로부터 고종 황제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구국운동으로 승화하였다. 이 비폭력 항일정신은 뒷날 3. 1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으로 이어져 우리의 소중한 정신유산이 되었다.
광문사 기념비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대구에서 대한 자강회에 영향을 받아 설립된 자생 계몽 운동 단체로서 흥학 설교(興學設校)와 식산흥업(殖産興業)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교육 진흥을 바탕으로 한 사회 발전을 목적으로 하였다. 대구 광문사에는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층 등 지역의 공망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대구 광문사의 사장에는 김광제(金光濟), 부사장에는 서상돈(徐相墩)이 맡았다. 1906년 4월에 개최한 총회에서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관한 방침을 의결하였다. 이를 위해 대구 광문사 내에 문회를 설치하고, 그 회원으로 400~500명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1906년 3월 새로이 경상북도 관찰사로 부임한 신태휴(申泰休)와 연대하여 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에 신태휴는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황제의 칙유(勅諭)와 천 원의 하사금을 매개로 하여 달성군수 김한정과 함께 관덕정(觀德亭)을 수리하여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 학교 설립에 나섰다. 여기에 대구 광문사 사원 다수가 발기인이 되어 기금 조성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또한 신태휴는 탁지부의 훈령대로 측량 강습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찰부 소재 낙육재와 연계재 소속 전토를 합해 달명의숙(達明義塾)을 설립하고, 교장에 이현주(李玄澍), 부교장 겸 강사에 김광제 등이 맡게 하였다. 그밖에 낙육재에 공립 대구 중학교, 대구 사립 양성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리하여 경상북도 관내 41개 군에 370여 개의 학교가 설치되어, 학생 수가 무려 4,500여 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대구군의 학생 수는 470여 명에 달했다. 1907년 2월에 대구 광문사 문회는 학교 설립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구 광문회로 바꾸고, 학문 진흥과 학교 설립에 대한 황제의 조칙을 낭독 선포한 후 회원들이 각 군을 순행하여, 학교 설립 방침과 사회적 취지를 연설하고,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강구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 문회는 일본동아 동문회(東亞同文會), 청나라 광학회(廣學會)와 국제적으로 연계하여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는 동시에 교육 진흥을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대구 광문사 문회는 대한 자강회에서 정부에 의무 교육 실시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이어서 강제적 의무, 곧 의무 교육제를 시행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다시 정부에 건의하였다. 또한 대구 광문사는 출판 활동에도 역점을 두었다. 곧 동서양 서적의 번역 출판과 충효열행(忠孝烈行)에 관한 사례집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또한 각 군 관리의 잘잘못과 인민의 선악을 조사하여 매월 3회씩 잡지로 발행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구 광문사는 출판 사업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해 동사 내에 찬술원을 두었다. 1906년 5월 대구 지방에는 계몽 운동과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던 자치 조직으로서 인민 대의소(人民代議所)가 조직되었다. 인민 대의소는 민지 개발(民智開發), 민권 부식(民權扶植), 설교 흥학(設敎興學), 식산흥업 등의 진흥을 목적으로 하면서,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인민의 회의체였고, 자치 및 자강을 도모하여 국권을 확립하고자 한 단체였다. 1907년 1월 대구 광문사 문회는 문회를 대동 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단연 보상 운동(斷煙報償運動)이 제기되어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자생적 계몽 운동 단체로서 설립된 대구 광문사는 교육 운동, 문화 운동, 경제적 실력 운동 등을 전개하여 한국 근대 계몽 운동을 심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