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이태직 집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태직 기념비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태직 애국시비
이태직(1878 - 1913)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금성(金城)면 산운(山雲)동에서 태어났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반대하고 일제를 규탄하는 소회진술문(所懷陳述文)을 작성하여 이상재(李商在)를 방문하고 대책을 토의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문서를 압수 당하고 구치되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작성한 것이 발각되어 압수 당했으며, 의성경찰서에 50일간 구치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에의 납세와 부역(賦役)을 거부하고 일황 명치(明治)의 사망 시복상을 반대하다가 다시 의성경찰서에 구치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우용택 숭모비
우용택(1868 - 1940)은 경상북도 의성(義城)군 안계(安溪)면 교촌(校村)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1904년 2월 러 일전쟁을 도발하여 일본군을 우리나라에 불법 상륙시키고 「제일차 한 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내정간섭을 하며 한국독립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자, 동지 강원형(姜遠馨) 등과 함께 일본군의 불법침략을 규탄하는 공함(公函)을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일제가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여 매국행위에 내세우자 일진회를 규탄하다가 1905년 5월 일제 헌병대에 구속되었다. 1905년에 석방된 후에도 정부 내의 친일대신들과 일제에 대한 굴복정책을 탄핵하는 상소를 수차 올리고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후에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당약서당(현 부강서당)
당약서당(현 부강서당)은 경상북도 청송군 주왕산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 사설 교육기관이다. 부강서당(鳧江書堂)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유치명 유치명(柳致明)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병신창의(丙申倡義) 청송 의병의 선열을 추모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청송지역 의병 83위 위패를 보관하고 있었으나, 2011년에 개관된 항일의병기념공원 내 충의사(忠義祠)로 청송 의병 선열의 위패가 이안(移安)되었다.
유병헌 집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병헌 사당(숭의재)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병헌 묘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병헌 순국기념비
유병헌(1842 - 1918)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북삼(北三)면 숭오(崇烏)동에서 태어났으며, 이명은 유병혜이다.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여론을 환기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일제의 불의와 이완용 등의 매국행위를 통박하고 한국인은 일본에게 세금을 내어서는 안되며 은사금도 거절해야 함을 역설하고, 일제총독 사내정의의 송덕비를 세우려는 친일분자들의 행동을 반대하여 규탄하였다. 1918년 자기의 주장을 스스로 실천하여 양조(釀造)를 하고는 일제에의 세금납부를 거부하였다. 일제 경찰이 그를 투옥하자 굴복하지 않고 투옥 7개월만에 8일간 단식하여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원형 집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원형 재실(혜사정)
강원형(1862 - 1914)은 경상북도 칠곡(漆谷)군 지천(枝川)면 신동(新洞)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만행이 자행되자 이를 규탄하는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2월 일본이 러 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해서 내정을 간섭하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그 수좌(首座)가 되어 일본공사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정책과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반성을 촉구했으며, 일본이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때에는 결사적으로 이에 맞서 싸울 결의를 전달하였다. 1905년 3월 일본 헌병대가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비서승 허 위(許蔿) 등 3인을 일제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격문을 돌렸다 하여 구속하자, 강원형은 일본군 사령부에 항의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13도유약소의 대표로서 각국 공사관에 공함을 보내어 일본의 교활한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3인의 구속에 대한 공개담판을 요구하였다. 강원형 등의 이러한 운동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강원형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45일간 구속되었다. 1905년 5월에 석방된 후에도 일본의 배신과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항의공함을 일본 공사관에 여러 차례 발송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곧 13도 유생 연명소(聯名疏)에 소수(疏首)가 되어 상소를 올리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일본 공사의 횡포무례를 엄징할 것을 요구했으며, 같은 뜻을 시민들과 세계에 성명하여 시민들의 국권회복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투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선독립 광주신문 제작지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은 광주에서 있었던 3.10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민중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황상호(黃尙鎬)가 서울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본따서 발행한 신문이다. 제4호까지 발행되었고, 주동자들은 징역을 언도받았다. 황상호 등 제중원 직원들은 광주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과 「2.8독립선언서」 등을 미리 접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광주와 전라남도에도 3.1운동의 필요성과 움직임을 알릴 매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는 9절지 크기의 종이 2장으로 만들어졌다. 제4호까지 간행되었는데 제1호의 경우 1면에는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의 내용이 간추려 들어갔고, 2면에는 1919년 3월 10일 일어난 3.10만세운동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밖에도 고종 독살설, 미국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이 포함되었다.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제중원의 회계 직원이던 황상호와 간호사 홍덕주(洪德周), 약제사 장호조(張鎬祚) 등에 의해 제1호 300부가 제작되었다. 1호는 3월 13일 광주 큰 장[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교 부근], 광주시내, 제중원 등에서 배포되었다. 2호는 1919년 3월 18일 광주 큰 시장에서 지역민에게 배포되었다. 이후 황상호 등은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장호조, 홍덕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선독립 광주신문은 광주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현재 원본은 1호만 보전되고 있는데, 이 원본이 1983년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의 선교사 사택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조선독립광주신문』이 광주와 전라남도의 만세 운동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