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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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호 흉상
조철호(1890~1941)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에 유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유학중에 동기생인 지청천(池靑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龍山)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뻔 했으나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제대되었다. 퇴역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구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오산학교의 체육교사로서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고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3월 5일 만주로 망명했다가 봉천성(奉天省) 하마당역(下馬塘驛)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구한국군 교련방식에 의한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조선소년군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동년 6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8년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어 청년학생들을 훈련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상로재(창남학교)
입산마을은 1600년부터 이어진 탐진 안씨의 집성촌이다. 상로재는 원래 탐진안씨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1722년 창건 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1922년 중창되었다. 상로재는 1908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 곳이며, 독립운동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3호로 지정되었다. 상로재(霜露齋)는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리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상로재의 구조는 일반적인 화려한 고택이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고택이다. 대문채인 이필문의 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 같이 널찍한 터가 있으며 다시 좌측으로는 상로재로 드는 협문이 자그마하게 있다. 안희제(1885~1943)는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극로 집
이극로(1893~1978)는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이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국어학자, 정치인이다.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김재계 묘
김재계(1888~1938)는 전라남도 장흥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천도교의 장흥 교구장으로 있으면서 교주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서울로 독립운동성금 5백원을 가져가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인접 교구에 보내었으며, 면 별로 만세시위운동을 조직화하여 3월 15일 장흥군의 독립만세운동을 총지휘하였다. 3·1운동 후에는 천도교 중앙총본부의 금융관장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대도주(大道主) 박인호(朴寅浩)가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동학 2세 교주 최시형의 승통기념일)을 계기로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뜻에 따라 교인들로 하여금 아침저녁 식고할 때마다 일본의 멸망을 기원하는 특별기도를 실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다른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 교도로 하여금 안심가(安心歌)의 한 구절인 「개 같은 왜적 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一夜間)에 소멸하고 전지무궁(傳之無窮)하여 놓고 대보단(大報壇)에 맹세하고 한(汗)의 원수 갚아보세」를 암송하며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릴 것을 지시하여 이를 실시하였다.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것이 국권회복의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보고 중앙간부들과 함께 전국을 4개 구역으로 나누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멸왜기도」를 실시하다가, 1938년 2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일제는 중일전쟁 수행상 사건을 확대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70일만에 그를 기소유예로 석방했으나,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석방되자 얼마 후에 바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해안초등학교)
홍순창(1904~1956)은 강원도 명주 사람이다. 1938년 양구의 매동공립소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일제의 한국병탄의 부당성과 일제 식민지정책 및 한국인교원에 대한 차별대우를 비판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38년 4월부터 1940년 2월까지 국사 시간에 일제의 왜곡된 교과서대로 수업을 하지 않고 한말의 항일투쟁과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가르치는 등 독립사상을 배양하는 국사교육을 하고,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와 공출 등 식민정책을 비판하다가 1940년 3월 일제 경찰에 붙잡혀 1941년 8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모곡초등학교)
1919년 9월에 남궁억(1863~1939)이 사재를 털어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 부근에 대지를 매입하고 남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건평 30평에 8칸짜리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 건물에 무인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0년 2월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9월 4년제 사립 모곡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주변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자,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1922년 10월 100평의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1925년 3월 6년제 사립학교(보통학교)의 인가를 취득하여 정식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24년 겨울에 역사교과서 『동사략』(4권)을 간행하고, 1929년에는 사화집(史話集)인 『조선이야기』(5책)를 저술하였다. 또한 국어와 역사 교육, 농촌을 잘 살게 할 수 있도록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독서회를 만들어 독서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는 학교 실습지 500여 평에 무궁화 묘목을 기르고, 무궁화 묘목을 교회와 사립학교의 지우들에게 보급하였다. 그러나 1933년 11월 일제 경찰이 학교·교회와 청년들의 집을 급습, 남궁억과 교사, 그리고 마을청년 등 28명을 홍천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1933년 12월 모곡학교가 폐교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34년 3월 12명의 청년과 함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5일 모곡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궁억 흉상
남궁억 선생(1863~1939)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궁억 추모비
남궁억(1863~1939)은 1884년에 최초의 영어학교인 동문학 수료 후, 고종황제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1893년에는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7년 양양의 현산학교를 설립해 구국교육을 펼쳤다. 또한 같은 해 대한협회를 창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1919년에 모곡학교를 설립해 역사교육과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당이 발각되어 일제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9년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서 남궁억 기념관
남궁억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궁억 묘
남궁억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민영환 추모비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있는 현등사 삼충단에 설치된 비석으로, 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가평 삼충단은 1910년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 충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단이다. 민영환(1861 - 1905)은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성균관 대사성 재직 시 임오군란으로 부친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했다가 복직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 특명 전권공사, 유럽 6개국 특명 전권공사를 지내며 서양의 문물과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했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면서 한직을 전전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파기를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어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조병세 추모비
조병세는 본관 양주(楊州). 자 치현(穉顯). 호 산재(山齋). 시호 충정(忠正).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 되고, 185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864년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郞廳)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左議長)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과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종을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거절당하였다. 이어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형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그 후 가평 향제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와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