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TOTAL. 315 건
이만도 순국유허비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 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현섭 집, 순국지
이현섭(1844 - 1910)의 자는 서규, 호는 우헌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의 비보를 듣고 자결한 열사이다. 1885년(고종 22) 성균생원으로 관직에 나아갔다가,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자행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여 관직을 사임, 안동군 예안면 양평리에 은거하였다. 1910년 국치의 소식을 듣고 음독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도발 묘
유도발(1832 - 1910)의 자는 승수, 호는 회은이며, 일제강점기 경술국치에 통분하여 단식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숨은 일화도 많이 남겼다. 중년에 여러 번 이사를 하였는데, 마침내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에 이사하자 스스로 회은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9월에 전폐(殿牌)를 헐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상의 묘를 배별하고 여러 친척들을 비롯하여 자손·친지들에게 작별을 알린 뒤, 집에 돌아와 마당에 자리를 마련하고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한 다음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단식을 시작하여 죽을 때까지 자지(自誌)·자명(自銘) 등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1951년 안동유지들이 사회장을 지내고 화산(花山)에 이장하였으며, 진안의 이산묘(餌山廟)에 모셨다. 1962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상도 추모비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아도서숙
아도서숙은 일제 강점기에 무섬마을 주민들이 계몽 활동과 항일 운동을 벌인 근거지였다. ‘아도’는 아세아 조선의 섬인 수도리를 뜻하며 ‘서숙’은 서당을 의미한다. 1928년 10월, 이 지역 항일운동 지도자인 김화진 선생의 주도로 무섬마을 청년들이 대중의 모임 장소인 공회당을 세우고 모임·배움·단결을 기치로 아도서숙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아도서숙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봉건적·억압적이었지만 파격적으로 열린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분 계급과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배울 수 있었고, 학급 편성은 오전·오후·야간반을 두어 학생들이 가능한 시간에 와서 배우고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하였다. 주로 민족 교육과 문맹 퇴치 및 신문명 교육, 농사 기술 교육 등을 실시했으며,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만들면서도 수업에 참여해 배울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학생들의 단결심 고양과 체력 향상을 위해 강변 백사장에서 축구 같은 운동도 자주 즐기도록 했다.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철에는 제한 없이 학생을 수용하였다. 아도서숙은 9명의 운영위원회를 두고 이 같은 교육 체제를 유지했다. 운영위원이었던 김화진, 김종진, 김성규, 김종규, 김계진, 김명진, 김광진, 김희규, 박찬하 등은 모두 영주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 인물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수시로 체포되어 구류·투옥과 고문을 당하였다. 또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 의거가 있을 때에는 무섬마을의 부녀자들이 아도서숙의 호롱불 밑에서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다. 1931년 9월에는 일경 1개 소대가 몰려와 무섬마을 청년 18명을 체포하여 굴비처럼 한 오랏줄에 엮어 외나무다리를 건너 압송하기도 했다. 온갖 탄압에도 무섬마을 주민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1933년 7월, 아도서숙에 불을 질러 5년 만에 강제로 폐쇄하였다. 아도서숙은 이 지역 항일운동의 특징적 역사를 잘 말해 주는 뜻깊은 장소이다. 현재 건물은 원래 자리에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김순흠 묘
김순흠(1840 - 1908)의 자는 치화, 호는 죽포이며, 개항기 을미사변 후 이강년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일찍부터 문명이 인근에 널리 알려져, 1894년 당시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여러 차례 벼슬을 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거절했다.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여 허위(許蔿)·이강년(李康秊) 등의 의병장들과 행동을 같이하기도 하였으나,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열중하며 10여 년을 보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 살포하였다.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 소식을 듣자 비분하여 경학원(經學院)의 강사를 거절하고, “일제의 치하에서 자란 곡식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감행,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낙영 집
1920년 8월 9일 영주군 영주면 가흥리에서 「영흥노동야학회」 가 설립되었으며,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는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1923년 11월 18일 「금계노동야학」 을 설립하였다. 영주군 이산면에 있던 영주청년동맹 이산지부는 1928년 8월 8일 「신암야학」 을 설립하여 인근 농민들 40여 명이 교육했으며, 김낙영(金洛榮)·김익영(金益榮) 등과 함께 교사로 활동하였다. 우금촌두암고택(友琴村斗巖古宅)은 김낙영(金洛榮)이 살던 곳으로, 김낙영은 1930년 6월 6일 치안유지법위반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검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남악정
남약정은 1623(인조 1년) 애국지사 오하근의 선조인 남악 오여벌(吳汝橃)이 건축하였다. 남악정에 있는 경암기(敬菴記)를 이만도가 지었다고 알려져있다. 이만도(1842 - 1910)의 자는 관필, 호는 향산이며, 조선 후기 사간원정언, 교리, 중학교수 등을 역임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66년(고종 3)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병조좌랑에 제수되었다. 이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고, 홍문관부수찬으로서 남학교수(南學敎授)를 겸하였다. 또한 대신(문신)으로서 선전관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후 부교리·장령·지평·우통례(右通禮)·병조정랑·충청장시도사(忠淸掌試都事)·교리·응교·사간·집의·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역임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명성이 높았다. 또한 시강(侍講) 및 빈대(賓對) 때에 이만도가 상주하는 말을 고종이 모두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한목소리로 공격을 하였다. 그 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사리에 맞지 않다고 없앴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다시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가을 양산군수에 제수되어 굶주리는 백성을 보살피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였다.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벼슬길을 단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 놓고 경서를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렬하게 공박하는 소를 올렸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한 뒤 가선대부에, 1910년 자헌대부에 승자되었다.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한국이 병탄되자 유서를 지어 남긴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이만도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송상도 집
송상도(1871 - 1947)의 자는 성소, 호는 기려자, 미헌, 연파이며, 일제강점기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워 권상익(權相翊) 등 향내 제유(諸儒)와 교유하였으며, 당세의 명유인 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 등을 역방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송상도는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역대의 사적(史籍)을 섭렵하였을 뿐 아니라 일찍이 조선왕조사의 편찬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명나라가 망한 뒤 기려도사(騎驢道士)가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하였던 예에 따라, 우리 나라 애국지사의 사적을 편찬할 결심을 하였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십년간 돌아다니며 애국자의 유가족 또는 친지를 역방하면서 사적을 기록하는 한편, 사건 당시의 신문과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기려수필(騎驢隨筆)』을 편찬하였다. 이렇듯 현지답사를 통하여 채록된 『기려수필(騎驢隨筆)』은 당시 항일투쟁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문헌이다. 송상도는 1986년 건국표창, 1990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김동필 공적비
김동필(1860 - 1944)은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신령(新寧面) 신덕동(新德洞)에서 태어났다.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일본군을 한국에 상륙시켜 내정을 간섭하고 「제일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에 동지들과 함께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했으며, 각국 공사관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내었다. 또한 1905년 11월에는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였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자,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십삼도유약소의 동지들과 함께 연명으로 올리어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고 이완용 등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되어 1907년 7월에 10년의 유배형을 당하였다. 1909년 이상설(李相卨)이 제2회 만국평화회에 파견하는 국내대표로 김동필과 김진구(金鎭九)를 선정하여 극비리에 이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상해로 나오도록 촉구했으나 일제의 연금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백학학원
백학학원은 1921년 영천군 화남면 안천리에 설립된 신교육기관이다. 이 학원의 설립을 이끈 인물은 면우 곽종석과 회당 장석영의 제자인 조병건이다.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이 힘을 보탰다. 백학학원은 초등 과정이었는데 초등 졸업생들을 중등과정에 보내기 위한 예비교육 과정으로 보습과를 병설로 두기도 했다. 이육사·조재만·이원대·이진영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민족 교육 기관이다. 백학학원은 설립 이후 한때 200여 명의 학생을 수용할 정도로 면민이 일치단결하여 경영하였으나 1924년경부터 경영이 점전 어려워지게 되었다. 1924년 3월부터 영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사상단체 시온촌의 동인들이 이곳에 들어가서 농사를 경영하면서 백학학원을 맡아 경영하였다.
김순흠 기념비
김순흠(1840 - 1908)은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산면(豊山面) 수리(水里)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이강년(李康秊)과 상의하여 항일투쟁을 하다가 이듬해에 해산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침략행위와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들에게 배포하였다. 또한 을사조약 반대와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1908년에 일본인 재무서가 세금을 거두어 가서 일본군에 납부함에 의분을 금치 못하여 단식을 시작해서 1908년 9월 28일 순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