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석거리 3.1운동기념비
비석거리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에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미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는 3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월피리의 유익수는 수암면 성포리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자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도살장터에 모여 있다가 시장을 거쳐 비석거리에 집합하였다. 윤병소와 유익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향교,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의 홍순칠도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의 집에 모인 30여 명을 인솔하여 비석거리 집회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수암면의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수암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익수는 징역 1년, 홍순칠은 징역 1년, 윤병소는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유익수(1870~1926), 김병권(1878~1951), 윤동욱(1891~1968), 홍순칠(1877~1932)는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윤병소(1887~1919)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면내 18개 동리의 주민 2천여 명의 오전 10시에 비석거리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른 이들의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고, 해산을 명령하는 일경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읍내로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 공립 보통학교, 면사무소, 향교를 돌며 군중을 지휘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결국 시위 후 체포된다. 유익수는 이 해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윤병소는 5월 27일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된다. 홍순칠은 5월 27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병권은 5월 27일 징역 6월을, 윤동욱은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동년 7월 31일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는 윤병소에게, 1983년에는 유익수에게, 1992년에는 홍순칠에게, 1996년에는 윤동욱에게, 2006년에는 김병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유익수와 윤병소에게 유익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