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항쟁기념탑
화천지역 1919년 3․1만세운동은 천도교 김화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3월 23일에 천도교인들이 주도하여 500여명이 거사하였다. 그러나 주민의 내부 고발로 일본 헌병에게 발각되어 읍내로 향하던 시위대는 일본 헌병들의 총칼에 맞서 30분간 맹렬한 격투를 하였으나 읍내로 진입하지 못하였다. 또한 김창희의 지휘 하에 화천장터에 모인 논미리, 구운리, 노동리, 풍산리 등의 주민들도 후일을 도모하고 해산하였다. 3월 28일에는 유학자, 청년, 농민, 의병출신, 산림기수, 일부 구장 등이 주도하여 상서면민들과 더욱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천장날이었던 이날 상서면 봉오리에 모인 천도교인들과 다목리, 파포리 주민 1,000여명은 만세를 부르며 상서면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면장과 면서기를 사로잡아 만세를 부르게 하고 화천읍으로 진격하였다. 거사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모인 주민 2,000여명은 지금의 화천읍 신읍리에서 화천읍내로 향하던 중 신풍리에 도착한 일본헌병들이 군중에게 총격을 가해 격렬히 대치하다 4명이 즉사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시위대는 그들을 저지하는 헌병에게 무력을 가하기도 하고 관공서를 공격·파괴하기도 하는 등 강렬히 저항하였다.
화천지역 3․1만세운동은 군민 3,500여명 이상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인원만 175명이 넘었다. 이들 피검된 숫자는 강원도에서 화천군이 가장 많았으며, 22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즉결재판으로 태형을 받은 인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