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호 묘
사적지 개요
윤병호(1889-1974)는 경상남도 남해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에 안희제, 남형우, 서상일, 이원식, 김동삼, 이시열, 박중화, 배천택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新民會) 계열의 비밀 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3 1운동 직후에는 부산에서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白山商會, 뒤에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로 개편)의 지배인 겸 취체역(取締役, 주식회사의 이사)이 되어 실질적으로 이 회사를 관리하였다. 이 회사는 단순한 무역회사가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연락 기관이었다.1919년 11월에는 애국청년들을 민족간부로 양성하기 위하여 안희제와 함께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청년들을 인재로 양성하고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 결과,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 조선어학회의 전신)가 조선어사전 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사전 편찬사업에 참가했다. 그러나 결국, 1942년 10월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 정책을 대대적으로 강행하고 한글학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투옥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1943년 9월 18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의 옥고를 겪었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탐방로그
원래 윤병호 선생의 묘소는 남해군 설천면 덕신리 구수곡 묘역에 있었지만, 문의리 문의공동묘지로 이장을 하였다.
후손이 되시는 윤동직 선생과 연락이 되어서 직접 안내해 주셨다.
GPS상의 주소는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774-21이다.
후손이 되시는 윤동직 선생과 연락이 되어서 직접 안내해 주셨다.
GPS상의 주소는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 774-21이다.
인물정보
- 성명
- 김동삼
- 한자명
- 金東三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생몰년도
- 1878 ~ 1937
- 본적
- 경상북도 안동
- 포상훈격
- 대통령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남만(南滿)의 한교자치기관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고 3.1 운동시 남만(南滿)을 통한 한족회(韓族會)를 결성하였으며 상해민족대표대회(上海民族代表大會)에 한족회(韓族會) 대표로 출석하고 흥경현(興京縣)에 남만(南滿)의 자치군사기관으로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여 총장이 되어 만주독립군(滿州獨立軍)의 주도역할이 되었으며 중한 합작(中韓合作)으로 국제운동을 추진하고 양측대표회의(兩側代表會議) 의장(議長)이 되었다. 만주사변 중(滿洲事變中) 합이빈(哈爾賓)에서 피체(被逮)되어 경성옥(京城獄)에서 10년형 복역(服役) 중(中) 서거(逝去)함.
김동삼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남형우
- 한자명
- 南亨祐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75 ~ 1943
- 본적
- 경상북도 고령
- 포상훈격
- 건국포장
- 포상년도
- 1983
공적개요
1909.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하고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朝鮮國權恢復團中央總部)를 결성(結成)하였으며 1919.3.17 노령 해삼위 대한국민의회(露領海蔘威大韓國民議會)에서 산업총장(産業總長)에 피임(被任)된 후(後) 1919.4.10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臨時政府議政院議員)에 피선(被選)된 후(後) 법무총장(法務總長), 교통총장(交通總長) 1921.6.6 국민대표회 준비위원장(國民代表會準備委員長)으로 활약(活躍)한 사실이 확인됨.
남형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박중화
- 한자명
- 朴重華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본적
- 미상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 1908년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약 ○ 1909년 조직된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 당원(黨員)으로 활약 ○ 1920년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중앙집행위원회(中央執行委員會)의 회장으로 활약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 71,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 91. 93) (공적서(功績書) 546)
박중화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배천택
- 한자명
- 裵天澤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92 ~ 미상
- 본적
- 경상북도 대구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1
공적개요
1909년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1919년 만주(滿洲)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1921. 4월 중국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고 1923. 1~6월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비서장(秘書長)과 군사분과위원(軍事分科委員)으로 활동하고 1925. 4월 중국 북경에서 다물단(團)을 조직하여 부일배 처단 활동을 폈으며 1926. 10월 대독립당 조직(大獨立黨組織) 북경촉성회(北京促成會)를 조직하고 1927. 10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관내 촉성회연합회(促成會聯合會)의 집행위원겸 상무위원을 지냈으며 1932년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 조직결성에 참여하고 1933년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배천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서상일
- 한자명
- 徐相日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86 ~ 1962
- 본적
- 경상북도 대구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 1909 조직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당원으로 활약(한국독립운동사 p.91, 항일순국의열사전 p.71) 2. 이시영(李始榮), 박상진(朴尙鎭) 등과 대구 광복단을 조직하여 해외에서 무기를 밀수입하고 무력운동을 전개(동국혈사 권2 p.43) 3.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가
서상일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안희제
- 한자명
- 安熙濟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85 ~ 1943
- 본적
- 경상남도 의령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2
공적개요
1. 독립운동자로서 일찍이 동래(東萊)에 구명학교(龜明學校)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여 민족의 육영사업에 종사하였으며 또한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을 조직 혁명투사들과 연락하였음. 2. 1933년 만주(滿洲) 영안현(寧安縣)에 발해농장(渤海農場),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 교포의 생활안정과 청년훈련에 노력하였다 또 대종교(大倧敎) 신자로서 활약도 크다. 3. 1942년 일경이 만주(滿洲) 동경성(東京省)에 있는 대종교(大倧敎) 본부를 습격 윤세부(尹世復) 이하 25명이 체포 투옥중 1943년 옥사함.
안희제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윤병호
- 한자명
- 尹炳浩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89 ~ 1974
- 본적
- 경상남도 남해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09년 조직(組織)된 대동청년당 당원(大東靑年黨黨員)으로 활약(活躍).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91,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71)
윤병호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시열
- 한자명
- 李時說
- 운동계열
- 계몽운동
- 생몰년도
- 1892 ~ 1980
- 본적
- 평안북도 정주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1
공적개요
1909년 비밀결사(秘密結社)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안희제(安熙濟) 김동삼(金東三) 등과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만주(滿洲)로 망명하고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원(敎員)이 되어 독립군(獨立軍)의 양성과 한족회(漢族會)의 기관지를 발행하며 혁명이론을 전개하고 광한단장(光韓團長)이 되어 군자금과 단원 모집에 활동한 후 1930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교육부(敎育部) 책임자(責任者)가 되어 1933년 5월까지 20년간에 걸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이시열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원식
- 한자명
- 李元植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생몰년도
- 1887 ~ 1924
- 본적
- 함경북도 회령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09년 비밀단체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대원(隊員)으로 활약(活躍)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91 항일순국의열사전(抗日殉國義烈士傳), p.71)
이원식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