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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석 집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981-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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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배동석(1889-1924)은 1906년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聖中學校) 재학중, 배일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木浦)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이갑성의 자택에서 음악회를 빙자하여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璣)·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종로(鐘路), 3월 5일에는 남대문역(南大門驛)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김문진
한자명
金文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25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 중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아 이굉상(李宏祥)에게 경남 마산 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할 것을 권유하고 여비와 독립선언서 50매를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함.

인물정보

성명
김좌진
한자명
金佐鎭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89 ~ 1930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한민국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 16세 때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育英事業)에 종사함 2. 동년 10월 입경하여 윤치성(尹致晟), 노백린(盧伯麟) 등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개를 기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족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함 3. 1907년 이창봉(李昌奉) 설립의 고아원 총무 및 한성신보 이사(漢城新報理事)를 역임하여 국혼 고취(國魂鼓吹)에 진력함 4. 1908년 박상진(朴尙鎭)과 광복단(光復團)사건으로 3년을 복역 후 간도(間島)로 건너감 5. 3.1운동(運動) 당시(當時) 동만주(東滿洲)의 왕청현(旺청縣)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組織)하고 총사령(總司令)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를설치(設置)하여 독립군 간부양성(獨立軍幹部養成)에 진력(盡力)함 6.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同志 羅中昭), 이범석(李範錫)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靑山里作戰)에 참가(參加) 10배의 왜적(倭敵)을 대파(大破)하여 사상(死傷) 3천3백여명의 전과(戰果)를 거둠 7. 1922년 6월 중동선소분하지구(中東線小芬河地區)에서 사관양성(士官養成)에 주력(注力)함 8. 1926년 김혁(金赫)등과 더부러 신민부(新民部)를 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함 9.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中國救國軍司令官楊宇一)과 회담(會談)하고 공동전선(共同戰線)을 취(取)하였으며 10. 동년8월 국민당동삼성(國民黨東三省) 공작 책임자(工作責任者) 공패성장령(貢沛城將領) 악유사(岳維唆)과 회담(會談)하고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組織)하였으나 장작림(張作霖)의 탄압(彈壓)으로 실패(失敗)함 11. 1929년 정신(鄭信), 민무등(閔武等)과 중동선 일대(中東線一帶)에서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를 조직(組織)하고 주석(主席)으로 활동중(活動中) 동년음(陰)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高麗共産靑年會員) 주중한인청년동맹원(駐中韓人靑年同盟員) 박(朴)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拳銃狙擊) 피살(被殺)됨(향년 41재(才))

인물정보

성명
김형기
한자명
金炯璣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50
본적
경상남도 양산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재학(在學) 중 재경유학생회(在京留學生會) 회장(會長)으로 학생대표(學生代表)가 되어 3.1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참가(參加)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배포(配布)하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배동석
한자명
裵東奭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24
본적
경상남도 김해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중학교 재학시절부터 항일사상이 투철했으며 3.1독립만세 운동에서는 이갑성(李甲成)과 비밀활동을 하다가 향리 김해지방의 거사 주동자로 활동하다 징역 1년형을 받았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윤자영
한자명
尹滋瑛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4 ~ 1938
본적
경상북도 청송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2004

공적개요

1919. 3월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재학중 서울지역 학생운동(學生運動) 지도부의 일원으로 만세시위 운동(萬歲示威運動)을 주도, 일경에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아 9개월간(個月間) 옥고(獄苦)를 치르고 1920.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상임위원(常任委員) 및 집행위원(執行委員)에 선임되었으며, 1921. 1월 서울청년회 이사(理事)가 되었고 1921. 5월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여 1922. 10월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통합대회에 상해파 대표로 참여하고 1923. 3월 상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상해파 대표로 참석하여 안창호(安昌浩)그룹과 함께 개조파(改造派)를 형성,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강화에 노력하였으며, 1923. 6월 의열단(義烈團) 간부(幹部)로 김지섭의 투탄의거에 관여하였고 1926년 이후 노령(露領)과 만주(滿洲), 국내(國內)에서 사회주의 이념(社會主義理念)을 통한 민족 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을 지속적으로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갑성
한자명
李甲成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81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19년 3.1운동시(運動時) 민족대표삼십삼인중의 일인(一人)으로 일정(日政)에 구금되어 이년육개월간 마포감옥(麻浦監獄)에서 징역을 살었음 2. 1920년 복역중 3월 1일에 옥내(獄內) 전죄인들에 기념만세를 부르도록 지도하여 3800여명의 수감자가 일시에 만세를 부르게 되어 벌감(罰監)에 들어갔음 3. 출옥 후 이승만 박사(李承晩博士)에게 군자금 송부사건(軍資金送付事件)에 관계하여 육개월 수감되었고 민립대학 기금 모집 사건(民立大學基金募集事件)으로 평북(平北) 선천경찰(宣川警察)에 피검되어 육개월 복역하였으며 광주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을 지도하다가 징역 유월을 당하였다 4.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귀국 후 경북 경찰(慶北警察)에 피검되어 수십차 고문 후 석방되어 경찰의 감시하에 8.15를 맞었음

인물정보

성명
한위건
한자명
韓偉健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6 ~ 1937
본적
함경남도 홍원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1월부터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의 대표로 3·1운동(運動)을 주도한 후 4월 중국(中國) 상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내무위원(內務委員),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함경도의원(咸鏡道議員)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귀국한 직후 도일(渡日)하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에서 유학한 후 1923년 조선인유학생(朝鮮人留學生) 학우회(學友會)의 일원으로 국내(國內) 순회강연(巡廻講演)을 벌였고 1924년 귀국하여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재직하면서 1924년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고, 1926년 11월 정우회선언(政友會宣言)을 발표한 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창립발기인(創立發起人)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중앙위원(中央委員)으로 활동하다 검거를 피해 중국(中國)으로 망명하여 1929년 이후 당 재건과 항일 투쟁(抗日鬪爭)의 일환으로 공산주의자협의회(共産主義者協議會), 학생공산당(學生共産黨),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북평반제동맹(北平反帝同盟) 등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한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