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656
- 탐방로그
- 독립유공자 추모탑과 황현 선생 동상을 찾기 위해 전라남도 광양의 우산공원에 왔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황원(黃瑗), 최태주
梅泉 黃玹 先生 像(매천 황현 선생 상)
매천 황현 선생 동상은 구례군 탐방 시에도 만난 적이 있다.
전남 구례군 매천사, 호양학교, 청천초등학교 황매천선생유시비
전남 구례군 서시천 체육공원 매천 황현선생 시비
전남 구례군 매천사, 호양학교, 청천초등학교 황매천선생유시비
전남 구례군 서시천 체육공원 매천 황현선생 시비
절명시(絕命詩)
난리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못 이뤘다.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창천을 비추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조칙은 이제 다시 있을 수 없으니
구슬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도다.
난리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몇 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 뜻을 못 이뤘다.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물거리는 촛불만이 창천을 비추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조칙은 이제 다시 있을 수 없으니
구슬같은 눈물이 종이 올을 모두 적시도다.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시름하는구나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 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 위해 세운 작은 공하나 없었으니
이 죽음은 인(仁)이지 충(忠)은 되지 못하리.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 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 위해 세운 작은 공하나 없었으니
이 죽음은 인(仁)이지 충(忠)은 되지 못하리.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부끄럽도다.
梅泉 黃玹先生 年譜(매천 황현선생 연보)
1855년(철종 6) 음력 12월 11일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에서 부친 황시물과 모친 풍천노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남.
1865년(고종 2, 11세) : 구례 광의면 천사 왕석보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함.
1878년(고종 15, 24세): 서울로 진출, 이후 강위·이건창·김택영·여유형·정만조·신정희 등과 교유함.
1883년(고종 20, 29세) : 특설 보거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강등, 이 사건을 계기로 매천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광양으로 돌아옴.
1886년(고종 23, 32세): 지인들의 권유로 구례군 간전면 만수봉으로 이주.
1888년(고종 25, 34세) : 성균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중앙정계에 실망하고 다시 구례로 돌아옴.
1890년(고종 28, 36세): 구안실을 짓고 독서와 제자 양성에 힘씀.
1902년(광무 6, 48세):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 현 매천사로 이주
1905년(광무 9, 51세) : 을사조약 체결소식에 〈문변삼수(聞雙三首)〉를 지어 매국노를 성토하고,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애국 지사를 애도함.
1908년 (융희2, 54세) : 〈사립 호양학교 모연소〉를 지어 신학문과 인재양성을 역설하고, 문인제자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교육하도록 독려함.
1910년 (융희 4, 56세) : 음력 8월 7일 경술국치를 통분하여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함.
1911년 : 동생 황원과 제자 유림등이 성금을 모았으며, 중국에 망명 가 있던 김택영이 「매천집」을 간행, 일제의 눈을 피해 국내로 반입함.
1942년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 문성산 아래 가족묘지에 안장함.
1962년 :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1999년 8월의 문화인물 선정, 2000년 매천사당 정비, 2002년 생가 건립, 2004년 동상 건립.
1855년(철종 6) 음력 12월 11일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에서 부친 황시물과 모친 풍천노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남.
1865년(고종 2, 11세) : 구례 광의면 천사 왕석보 선생에게 나아가 수학함.
1878년(고종 15, 24세): 서울로 진출, 이후 강위·이건창·김택영·여유형·정만조·신정희 등과 교유함.
1883년(고종 20, 29세) : 특설 보거과에 응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강등, 이 사건을 계기로 매천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광양으로 돌아옴.
1886년(고종 23, 32세): 지인들의 권유로 구례군 간전면 만수봉으로 이주.
1888년(고종 25, 34세) : 성균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중앙정계에 실망하고 다시 구례로 돌아옴.
1890년(고종 28, 36세): 구안실을 짓고 독서와 제자 양성에 힘씀.
1902년(광무 6, 48세): 구례군 광의면 월곡마을 현 매천사로 이주
1905년(광무 9, 51세) : 을사조약 체결소식에 〈문변삼수(聞雙三首)〉를 지어 매국노를 성토하고,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애국 지사를 애도함.
1908년 (융희2, 54세) : 〈사립 호양학교 모연소〉를 지어 신학문과 인재양성을 역설하고, 문인제자들로 하여금 민족정신을 교육하도록 독려함.
1910년 (융희 4, 56세) : 음력 8월 7일 경술국치를 통분하여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함.
1911년 : 동생 황원과 제자 유림등이 성금을 모았으며, 중국에 망명 가 있던 김택영이 「매천집」을 간행, 일제의 눈을 피해 국내로 반입함.
1942년 : 광양시 봉강면 서석마을 문성산 아래 가족묘지에 안장함.
1962년 :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1999년 8월의 문화인물 선정, 2000년 매천사당 정비, 2002년 생가 건립, 2004년 동상 건립.
독립유공자 추모탑과 매천 황현 선생 동상이 있다.
독립유공자 추모탑 안내문
관리번호: 55-1-40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자: 광양시장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우산공원내
이 탑은 우리시 출신 독립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분들의 공헌과 희생을 항구적으로 존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여기는 독립유공자의 애국영혼이 모셔진 성스러운 곳입니다. 모두가 겸손하고 엄숙한 마음자세로 먼저가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의 혼을 깊이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광양시장
관리번호: 55-1-40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자: 광양시장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우산공원내
이 탑은 우리시 출신 독립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분들의 공헌과 희생을 항구적으로 존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여기는 독립유공자의 애국영혼이 모셔진 성스러운 곳입니다. 모두가 겸손하고 엄숙한 마음자세로 먼저가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의 혼을 깊이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광양시장
독립유공자 추모탑
관리번호: 55-1-40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자: 광양시장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우산공원내
이 탑은 우리시 출신 독립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분들의 공헌과 희생을 항구적으로 존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여기는 독립유공자의 애국영혼이 모셔진 성스러운 곳입니다. 모두가 겸손하고 엄숙한 마음자세로 먼저가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의 혼을 깊이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관리번호: 55-1-40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자: 광양시장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우산공원내
이 탑은 우리시 출신 독립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고 이분들의 공헌과 희생을 항구적으로 존중하고, 숭고한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건립되었습니다. 여기는 독립유공자의 애국영혼이 모셔진 성스러운 곳입니다. 모두가 겸손하고 엄숙한 마음자세로 먼저가신 순국선열들의 애국충절의 혼을 깊이 되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추모의 글.
산 깊고 물 좋은 곳곳에 고로를 짓고 호미와 보습 철광석을 녹여내 무기를 제조한 장종부대 백운산 의병의 유격전을 시작으로 일제의 침략에 맞선 광양인의 자주독립 투쟁은 잠시도 그침 없이 맥맥히 이어졌어라.
학생은 배움터에서 어른들은 일터에서 노동자 농어민은 광산과 논밭 바다에서 힘 있는 자는 힘으로 재물있는 자는 재물로 지식있는 자는 지식을 하나로 보태고 모아 자주독립 해방을 위해 맹렬히 싸웠어라.
백의민족 금수강산을 덮친 이리 떼들을 향해 칼이되고 총이 되고 화살이 되어 적들의 심장을 곳곳에서 타격하였어라 만세 깃발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도 했어라. 의병들의 주둔지 백운밀명에서 만세소리 우렁찬 광양장터까지 임들의 발자취 영원불멸 선명하리니 애민애족 자주독립을 향한 임들의 숭고한 광양인의 당찬 기운과 함께 세세토록 빛나리라.
산 깊고 물 좋은 곳곳에 고로를 짓고 호미와 보습 철광석을 녹여내 무기를 제조한 장종부대 백운산 의병의 유격전을 시작으로 일제의 침략에 맞선 광양인의 자주독립 투쟁은 잠시도 그침 없이 맥맥히 이어졌어라.
학생은 배움터에서 어른들은 일터에서 노동자 농어민은 광산과 논밭 바다에서 힘 있는 자는 힘으로 재물있는 자는 재물로 지식있는 자는 지식을 하나로 보태고 모아 자주독립 해방을 위해 맹렬히 싸웠어라.
백의민족 금수강산을 덮친 이리 떼들을 향해 칼이되고 총이 되고 화살이 되어 적들의 심장을 곳곳에서 타격하였어라 만세 깃발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도 했어라. 의병들의 주둔지 백운밀명에서 만세소리 우렁찬 광양장터까지 임들의 발자취 영원불멸 선명하리니 애민애족 자주독립을 향한 임들의 숭고한 광양인의 당찬 기운과 함께 세세토록 빛나리라.
광양 출신 독립유공자
김응백, 황벽학, 황현(黃玹), 백학선, 황순모, 김상환, 김채룡, 박병하(朴炳夏), 장세영, 진신애, 황채현, 김갑곤, 김지태, 김희곤, 신명준, 정진무, 김상후, 김석용, 김정기, 박용래, 박용수, 서경식, 임태일, 정귀인, 정성련, 정귀석, 정순제, 박정수, 김희로
김응백, 황벽학, 황현(黃玹), 백학선, 황순모, 김상환, 김채룡, 박병하(朴炳夏), 장세영, 진신애, 황채현, 김갑곤, 김지태, 김희곤, 신명준, 정진무, 김상후, 김석용, 김정기, 박용래, 박용수, 서경식, 임태일, 정귀인, 정성련, 정귀석, 정순제, 박정수, 김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