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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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16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白凡 金九 先生 母子 銅像 獻詞(백범 김구 선생 모자 동상 헌사)
백범 김구 선생은 인천과 특별한 연고를 가진 민족 지도자다. 두 차례의 수감 생활을 통해 선생과 인천이 매우 따뜻한 교감을 나눈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더구나 인천은 분단의 상처가 깊은 곳이라 38선을 베고 쓰러진 선생의 평화 통일 사상에 공조하는 바가 큰 고장이다. 이에 선생과의 뜻 깊은 만남을 기념하고 선생의 완전 자주 독립 사상을 후세에 전하고자 인천 시민의 뜻과 힘을 모아 선생의 동상을 세우며 선생이 1949년 손수 고증하여 만드신 어머님의 동상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이 자리에 함께 모신다. 냉전의 해체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통일의 기운이 성숙하고 있는 오늘 선생이 낳고 자란 황해도와 지척지간에 있는 우리 인천의 시민들은 선생의 겨레 사랑과 평화 통일 사상의 뜻을 가슴에 늘 아로새기면서 우리의 다짐을 이 건립문에 새기는 바이다.
1997년 10월 15일
郭樂園 女史 像(곽낙원 여사 상)
인천대공원(남문)에서 쭉 걸어가야 한다.
백범광장 - 관리번호 : 14-1-10 / 관리자 : 인천광역시 동부공원사업소 / 소재지 :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산190번지
백범 김구 선생(1876~1949)는 우리민족의 큰 스승으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일찍이 열아홉에 동학군 선봉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고, 구한말에는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식민지 시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主席)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 분투하였고, 해방후 신탁통치에 반대 궐기를 하시며 민족분단을 막으려 남북을 오가며 애쓰셨으나 1949년 6월 28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첫번째는 지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 3년간 수감되었고, 두번째는 1911년 안악(安岳)사건으로 5년간 인천감옥 투옥되어 인천 축항공사(築港工事) 강제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생활에서 선생은 민중의 고통과 함께 불굴의 민족항도자(恒道者)로 단련되었으니 선생의 깊은 겨레사랑은 인천을 통해 얻은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선생과의 뜻깊은 만남을 기념하고 선생의 완전자주 독립사상을 후세에 전하고자 인천시민의 뜻을 모아 선생의 동상을 세우며, 1948년 선생이 손수 고증하여 만드신 어머님의 동상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함께 모셨다.
- 白凡 金九 先生 母子 略傳(백범 김구 선생 모자 약전)중에서 -
백범 광장 / KIM KOO SQUARE / 白凡廣場
백범 김구 선생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모신 곳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이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 시는 백범 김구 선생의 조국분단을 막고 통일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결행하셨던 남북연석회의를 전후하여 자주 쓰신 글이다.
白凡 金九 先生 像(백범 김구 선생 상)
白凡 金九 先生 母子 略傳(백범 김구 선생 모자 약전)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다. 선생은 식민지 시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해방 운동에 분단 시대에는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통일 운동에 일생을 헌신하였다. 선생은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안동김씨 순영과 현풍곽씨 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열아홉에 동학군 선봉장으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섰고 치하포에서는 국모의 원수를 갚아 나라에 의인이 있음을 널리 알렸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몰린 구한말에는 애국 계몽 운동에 투신하였고 식민지 시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 분투하였다. 해방 후 신탁통치에 반대 궐기하였고 민족분단을 막으려고 남북을 오가며 애쓰시다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일생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올곧은 길을 걸었던 선생의 뒤에는 항상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있었다. 선생의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아들을 격려했던 여사는 선생이 두번재 옥에 갔을 때 "경기감사가 된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아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선생은 인천과 특별한 인연을 가졌다. 첫번째는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 감옥에 2년간 수감된 것이요 두번째는 1911년 안악 사건으로 5년간 투옥될 때 다시 인천 감옥으로 옮긴 것이다. 특히 두번째에는 인천 축항공사 노역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두 차레에 걸쳐 인천에서 겪은 수감 생활에서 선생은 민중과 고통을 함께하는 불굴의 민족 지도자로 단련되었으니 선생의 깊은 겨레 사랑은 인천을 통해 얻은 결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