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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3-2
- 탐방로그
-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3-2에 위치한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를 찾았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옆에는 기적비에 대한 설명이 기재된 안내판도 함께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下溪마을 獨立運動 紀蹟碑(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
우리역사 오천년에 가장 우리다운 것은 선비의 삶이다. 선비는 누구나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글과 도덕을 존중하고 의리와 범절을 세워 살아가는 모든이를 말한다. 하계촌에도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 하계촌의 인적은 450년전에 퇴계의 양진암에서 비롯되나 마을은 4백전전에 선생의 손자 동암 이영도께서 개척하였다. 진성이씨 집성촌으로 1975년 안동호가 범랍할때까지 370년간 선비의 기상을 드높여 왔다. 이곳 선비들이 표방한 퇴계사상의 요체는 '인'과 '경'에 있는데, 표현방법은 때에따라 달랐다. 임진왜란때 기의했던 동암은 병자호란을 당하자 79 고령에 비분 감질로 세상을 마쳤고 선생 12세손 향산 이만도와 13세손 동은 이중언은 경술국치때 자정으로 순국하였다. 치택 인생을 견위수명으로 마감한 것이다. 이런 전통은 다시 독립운동으로 꽃피어 청사를 새롭게 빛냈다. 고사를 알려거던 여기서 백보 올라가 선생묘소에 새겨져 있는 자명을 보든지 백보 내려가 수몰된 하계마을에서 고인의 예던 길을 살펴보라.
하계마을은 지리조차 남다르다. 뒤에서 내로오는 상계와 하계수 좌우에는 한지산과 영지산이 우뚝하고 밖으로는 청량산과 용두산이 하늘을 찌른다. 왼쪽 건지산은 낙수에 이르러 월란대를 바라보고 청룡을 들었는가 하면 오른쪽 영지산은 백호답게 도산서원 형국을 만들고 앉았다. 앞으로는 청아한 강물이 도산구국을 연출했는데 제6곡의 진경이 머문곳 여기가 하계촌이다. 과연 산은 높은 덕을 품었고 물은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도다. 의성현 의동면 또는 예안군 도산면 토계동 하계촌이라 했다. 수몰당시 일백호에 불과했으나 세진 세사 세태 태순 언순 심예 만덕 만규 만송 만운 만수 만규 중두 중언등 홍패 15장에 이르고 견순 만순 중철 익호 필호등 문명을 떨지 언사와 백패까지 손꼽으면 사람을 일컫는다. 문집만 32인 일백종을 헤아린다. 동암 후손의 원촌 단사 섬촌 부포마을까지 보면 홍패 24장으로
하계마을은 지리조차 남다르다. 뒤에서 내로오는 상계와 하계수 좌우에는 한지산과 영지산이 우뚝하고 밖으로는 청량산과 용두산이 하늘을 찌른다. 왼쪽 건지산은 낙수에 이르러 월란대를 바라보고 청룡을 들었는가 하면 오른쪽 영지산은 백호답게 도산서원 형국을 만들고 앉았다. 앞으로는 청아한 강물이 도산구국을 연출했는데 제6곡의 진경이 머문곳 여기가 하계촌이다. 과연 산은 높은 덕을 품었고 물은 영원한 생명을 노래하는 도다. 의성현 의동면 또는 예안군 도산면 토계동 하계촌이라 했다. 수몰당시 일백호에 불과했으나 세진 세사 세태 태순 언순 심예 만덕 만규 만송 만운 만수 만규 중두 중언등 홍패 15장에 이르고 견순 만순 중철 익호 필호등 문명을 떨지 언사와 백패까지 손꼽으면 사람을 일컫는다. 문집만 32인 일백종을 헤아린다. 동암 후손의 원촌 단사 섬촌 부포마을까지 보면 홍패 24장으로
명조대가의 영예가 더없이 형형하다. 그래서 수졸당의 이끼가 사시에 창연한 것이다.
근현대 백년사에도 찬란한 발자취를 남겼다. 1894 갑오왜란이후 국운이 위태로울때마다 몸을 던진 하계인이었다. 구한말 의병전쟁에서는 의성의진을 결설하여 싸웠고 젊은이들은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에 참가하여 계몽주의 확산에 힘쓰면서 보문의숙을 설치하여 구국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운명을 다하자 만도 중언이 단식순절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그때의 임종기록이 청구일기이다. 이어 원일은 독립군 기지개척을 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중업은 상복을 입은채 큰집주손 원일과 처남 김대락과 동서 이상룡의 망명길을 도왔다. 나라는 쇠락해도 푸른 가풍은 피어나는 장엄한 광경이 아니던가. 하계촌이 독립운동의 고장이 되었다는것이 우연이 아니다. 1913년 광복회는 도곡리 이종영가에 이어 1917년에는 하계촌 토굴에 본부를 두었고 1919년 삼일운동때는 김창숙과 더불어 만규 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만규 이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비호 이동봉 이기호 이용호 이극호 이호준 이운호 이열호 이상호 이영호
근현대 백년사에도 찬란한 발자취를 남겼다. 1894 갑오왜란이후 국운이 위태로울때마다 몸을 던진 하계인이었다. 구한말 의병전쟁에서는 의성의진을 결설하여 싸웠고 젊은이들은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에 참가하여 계몽주의 확산에 힘쓰면서 보문의숙을 설치하여 구국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운명을 다하자 만도 중언이 단식순절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그때의 임종기록이 청구일기이다. 이어 원일은 독립군 기지개척을 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중업은 상복을 입은채 큰집주손 원일과 처남 김대락과 동서 이상룡의 망명길을 도왔다. 나라는 쇠락해도 푸른 가풍은 피어나는 장엄한 광경이 아니던가. 하계촌이 독립운동의 고장이 되었다는것이 우연이 아니다. 1913년 광복회는 도곡리 이종영가에 이어 1917년에는 하계촌 토굴에 본부를 두었고 1919년 삼일운동때는 김창숙과 더불어 만규 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만규 이중업이 파리장서를 만들었고 그때 이비호 이동봉 이기호 이용호 이극호 이호준 이운호 이열호 이상호 이영호
동욱 권헌이 이출이 등은 예안시위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일련의 독립운동을 통하여 전통유림이 근대유림으로 발전해 갔다. 여기서 현대 유학을 이끈 탁과 윤석등의 학덕까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간도의 경학사 신흥학교 한족회 서로군정서 통의부로 이어진 안동유림을 주축으로 출발한 독립군에는 원일 외에도 풍호 목호 원대등 문중의 청년선비가 무수하게 참가하였고 1925년에는 내몽고에 별도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흠 종흠 형제가 김창숙 김화식과 함께 제2유림단운동을 일으켰다. 만수 중업 동흠 3대 독립운동을 내조하다가 일경의 고문에 실명 당했던 김락여사는 그때 다시 잡혀가 옥중에서 묵비투쟁하여 인자한 어머니는 의리를 머금고 산다는 여인 선비상을 세웠다. 하계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앙탈은 김락여사에 그치지 않았다. 의병전쟁때 온계 및 퇴계종가와 교동과 오산대까지 불태운 그들은 인명도 무수히 앗아갔다. 식민지하에서는 하계촌 복판에 경찰지서를 설치하고 남녀노소를 무지막지하게 잡아가 고문했다. 그래도 의리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신념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동암 13세손 육사 이원록이 원촌리를 떠나 광야를 읊으며 중국대륙을 누볐던것도 이때였다. 마을의 청소년은 예안청년회와 예안노동대나 안동청년동맹같은 새로운 단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갔다. 운동노선이 다양해지고 분화하면 통일전선이 제기되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신간회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운호 열호께서 주목을 받았던것은 그의 진보성이 1930년을 전후한 전환기에 회자됐기 때문이다. 하계인의 독립운동으로 또 특별한 것은 의병전선에 투신했던 선구 현구 형제가 교동집을 잃고 유랑생활중 현구께서 창씨개명을 반대하다가 자결한 사실이다. 식민지 말기의 자정은 범흥리 이예형의 경우와 함께 암흑같던 해방전야를 밝힌 별빛이라 그 별들이 모여서 해방의 새벽을 열었다. 그러므로 해방은 독립운동사를 다양하게 장식한 하계인의
한편 서간도의 경학사 신흥학교 한족회 서로군정서 통의부로 이어진 안동유림을 주축으로 출발한 독립군에는 원일 외에도 풍호 목호 원대등 문중의 청년선비가 무수하게 참가하였고 1925년에는 내몽고에 별도의 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진흠 종흠 형제가 김창숙 김화식과 함께 제2유림단운동을 일으켰다. 만수 중업 동흠 3대 독립운동을 내조하다가 일경의 고문에 실명 당했던 김락여사는 그때 다시 잡혀가 옥중에서 묵비투쟁하여 인자한 어머니는 의리를 머금고 산다는 여인 선비상을 세웠다. 하계인에 대한 일본 관헌의 앙탈은 김락여사에 그치지 않았다. 의병전쟁때 온계 및 퇴계종가와 교동과 오산대까지 불태운 그들은 인명도 무수히 앗아갔다. 식민지하에서는 하계촌 복판에 경찰지서를 설치하고 남녀노소를 무지막지하게 잡아가 고문했다. 그래도 의리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고 신념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다. 동암 13세손 육사 이원록이 원촌리를 떠나 광야를 읊으며 중국대륙을 누볐던것도 이때였다. 마을의 청소년은 예안청년회와 예안노동대나 안동청년동맹같은 새로운 단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의 폭을 넓혀갔다. 운동노선이 다양해지고 분화하면 통일전선이 제기되기 마련이었다. 마침내 신간회운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운호 열호께서 주목을 받았던것은 그의 진보성이 1930년을 전후한 전환기에 회자됐기 때문이다. 하계인의 독립운동으로 또 특별한 것은 의병전선에 투신했던 선구 현구 형제가 교동집을 잃고 유랑생활중 현구께서 창씨개명을 반대하다가 자결한 사실이다. 식민지 말기의 자정은 범흥리 이예형의 경우와 함께 암흑같던 해방전야를 밝힌 별빛이라 그 별들이 모여서 해방의 새벽을 열었다. 그러므로 해방은 독립운동사를 다양하게 장식한 하계인의
영광이요 포상받은인가 20명을 넘을 만큼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하계촌의 자랑이다.
거기에도 함정이 있었던가. 1945년 해방후에 도산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유교부흥을 시도했던 한편에서 좌우분열이 심화되어 조국의 운명처럼 남북상쟁의 시련이 닥쳤다. 거기서 극단을 버리고 포용의 지혜와 도량을 키워야한다는 교훈을 얻어다. 대현의 유지를 바로 세우고 선비의 삶과 독립운동정신을 포용의 방도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천리이다. 하계마을은 물에 잠기고 하계인은 산지사방으로 떠나야 했지만 하계인들이여!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하계마을이 4백년간 닦아놓은 선비의 길은 잊지말자.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독립운동은 현대지성사의 기둥이 됐다. 누가 하계마을을 잊으오리까 누가 하계선비의 정신과 길을 잊으오리까.
겨레의 꽃으로 피어날 하계촌의 역사를 기리 새기고자 수몰된 마을언덕에 이 정석을 세운다.
거기에도 함정이 있었던가. 1945년 해방후에 도산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유교부흥을 시도했던 한편에서 좌우분열이 심화되어 조국의 운명처럼 남북상쟁의 시련이 닥쳤다. 거기서 극단을 버리고 포용의 지혜와 도량을 키워야한다는 교훈을 얻어다. 대현의 유지를 바로 세우고 선비의 삶과 독립운동정신을 포용의 방도로 삼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천리이다. 하계마을은 물에 잠기고 하계인은 산지사방으로 떠나야 했지만 하계인들이여! 어디서 어떻게 살더라도 하계마을이 4백년간 닦아놓은 선비의 길은 잊지말자.
그것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독립운동은 현대지성사의 기둥이 됐다. 누가 하계마을을 잊으오리까 누가 하계선비의 정신과 길을 잊으오리까.
겨레의 꽃으로 피어날 하계촌의 역사를 기리 새기고자 수몰된 마을언덕에 이 정석을 세운다.
기적비 작품설명
조형주제 : 하계마을의 독립운동
조형개념 : 퇴계사상을 이어받은 선비정신, 죽음으로 항거한 독립정신, 하계마을 수몰의 안타까움
조형요소 : 대칭적 공간 의와 경, 백과 흑, 원주, 초석, 만세를 부르는 두 팔.
조형특성 : 하계마을이 선비정신에서 발현된 독립운동의 성지인 점과 고려하여 수직성과 대칭성을 지닌 엄정 담백한 공간감을 조형함.
조형전개: 1. 비의 기단부는 육면체의 초석으로 천년을 괄 이 땅의 선비정신을, 그 위에 원주를 세워 수몰된 하계마을과 나라의 기둥이었던 이 고장의 인재를 상징함. 옥개부는 계단식으로 체감되도록 하여 퇴계선생으로부터 대를 이어 이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조형화함. 2. 초석의 좌 우측에 두 팔을 벌려 만세하는 모습을 학의 날개 형태로 표현하여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독립정신을 상징함. 3. 비석과 비문은 두 개의 오석통돌에 심각함, 비석은 옥개석 밑에 비문은 원주의 중간에 배치하여 백색과 흑색의 조화를 꾀하며 옛 선비의 인상을 시각화함. 4. 원주 앞뒷면을 평면화하여 의와 경 두 자를 음각으로 크게 심각함.
2004.10.7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
조형주제 : 하계마을의 독립운동
조형개념 : 퇴계사상을 이어받은 선비정신, 죽음으로 항거한 독립정신, 하계마을 수몰의 안타까움
조형요소 : 대칭적 공간 의와 경, 백과 흑, 원주, 초석, 만세를 부르는 두 팔.
조형특성 : 하계마을이 선비정신에서 발현된 독립운동의 성지인 점과 고려하여 수직성과 대칭성을 지닌 엄정 담백한 공간감을 조형함.
조형전개: 1. 비의 기단부는 육면체의 초석으로 천년을 괄 이 땅의 선비정신을, 그 위에 원주를 세워 수몰된 하계마을과 나라의 기둥이었던 이 고장의 인재를 상징함. 옥개부는 계단식으로 체감되도록 하여 퇴계선생으로부터 대를 이어 이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조형화함. 2. 초석의 좌 우측에 두 팔을 벌려 만세하는 모습을 학의 날개 형태로 표현하여 선비정신에서 비롯된 독립정신을 상징함. 3. 비석과 비문은 두 개의 오석통돌에 심각함, 비석은 옥개석 밑에 비문은 원주의 중간에 배치하여 백색과 흑색의 조화를 꾀하며 옛 선비의 인상을 시각화함. 4. 원주 앞뒷면을 평면화하여 의와 경 두 자를 음각으로 크게 심각함.
2004.10.7 하계마을 독립운동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23-2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를 찾아왔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묘소 앞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묘소 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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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선성(예안)의병에 이어, 나라가 망한직후 단식 순국자가 잇달았으며, 1910년 광복회 주역들을 배출한 마을이 이곳이다. 또 3.1운동당시 예안만세운동과 제1차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과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안청년회, 예안노동행동대, 안동청년동맹, 신간회 안동지회에도 하계마을 청년들이 줄지어 참가하고, 심지어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자결하는 인물마저 나올정도였다.
2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사실은 이 마을의 장직한 성향을 말해준다.
이처럼 빛나는 역사를 가진 하계마을은 1976년 안동댐건설로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족무제에 맞서 자신신을 불사른 하계사람들의 빛나는 행적도 없어진 마을처럼 기억에서 지워져갔다. 이를 아타깝게 여긴 유지들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살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을 세움에따라 마을 옛터에 이 기념비가 세워진것이다.
1895년 선성(예안)의병에 이어, 나라가 망한직후 단식 순국자가 잇달았으며, 1910년 광복회 주역들을 배출한 마을이 이곳이다. 또 3.1운동당시 예안만세운동과 제1차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과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안청년회, 예안노동행동대, 안동청년동맹, 신간회 안동지회에도 하계마을 청년들이 줄지어 참가하고, 심지어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자결하는 인물마저 나올정도였다.
20명이 넘는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사실은 이 마을의 장직한 성향을 말해준다.
이처럼 빛나는 역사를 가진 하계마을은 1976년 안동댐건설로 수몰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족무제에 맞서 자신신을 불사른 하계사람들의 빛나는 행적도 없어진 마을처럼 기억에서 지워져갔다. 이를 아타깝게 여긴 유지들이 자랑스러운 역사를 되살려 역사적 교훈으로 삼자는 뜻을 세움에따라 마을 옛터에 이 기념비가 세워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