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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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탐방로그
김좌진 선생 기적비는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백야기념관 앞에 위치해있다. 백야기념관은 김좌진 선생의 호인 '백야(白冶)'에서 따와 붙여진 기념관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김좌진 선생의 기적비는 선생의 생가이자 기념관인 백야기념관 앞에 있다.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 장군(將軍) 기적비
장군(將軍)은 일찌기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강화성(江華城)에서 전사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10대손(十代孫)인 부친 김형규(金衡奎)와 이씨부인(李氏夫人) 사이의 차남(次男)으로 1889년(一八八九年) 음력 11월(十一月) 24일(二十四日) 홍성군(洪城郡) 갈산면(葛山面) 행산리(杏山里)에서 태어났으니 본관(本貫)은 안동(安東)이요 자(字)는 명여(明汝)이며호(號)는 백야(白冶)이다. 세살 되던 해 부친(父親)을 여의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라났으나 천성(天性)이 호방하고 의지(意志)가 남달랐던 장군(將軍)은 한학(漢學)에 힘쓰는 한편 무예를 갈고 닦으며 장성(長成)하였다. 친형(親兄) 경진(景鎭)이 15촌수인 덕규(德圭)에게 출계)하자 이천석(二千石) 재산가의 가장(家長)이 되었다. 14세(十四歲)때에 해주오씨(海州吳氏)가문의 숙근 규수를 맞아 성혼(成婚)하였으며 16세(十六歲)에는 소년가장(少年家長)으로서 자기집의 노비삼십여명(奴婢三十餘名)의 노비문서(奴婢文書)를 불태워 그들의 신분(身分)을 해방(解放)시켜주고 또한 소작인(小作人)들에게는 농토(農土)를 무상(無償)으로 분배(分配)해 주는 등 사회개혁(社會改革)의 의지(意志)를 몸소 실천(實踐)하였다. 조국(祖國)이 일제(日帝)에 의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운(國運)을 위협(威脅)받던 1905년 장군(將軍)은 약관 18세(十八歲)의 나이로 구십여간(九十餘問)의 자기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民族敎育)에 힘쓰는 한편 대한협회(大韓協會) 홍성지회(洪城支會) 호서교육회(湖西敎育會)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등 여러 애국계몽단체를 차례로 조직(組織)하여 국권수호운동(國權守護運動)에 나섰다. 1908년에는 보다 더 적극적(積極的)인 구국투쟁(救國鬪爭)을 펴기 위하여 활동무대(活動舞臺)를 서울로 옮겨 사범학교부속 고아원의 총무(總務)로 일하면서 한성신문(漢城新聞) 이사(理事)의 직책을 맡아 언론투쟁(言論鬪爭)에도 관계하였다. 또한 항일의병(抗日義兵)들의 연락거점으로 활용(活用)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이창양행(怡昌洋行)을 국경도시인 신의주(新義州)에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설립운영(設立運營)하였다.1910년에 군사력(軍事力)을 앞세워 한반도(韓半島)의 무력점령(武力占領)을 기원(企圓)하던 일제(日帝)에 의해 나라를 빼았기게 되자 국내(國內)에서 전개해오던 국권수호투쟁(國權守護鬪爭)의 한계를 깨닫게 된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은 독립전쟁기지(獨立戰爭基地)를 해외(海外)에 마련하고 장기적(長期的)인 항일독립투쟁(抗日獨立鬪爭)을 꾀하게 되었다. 장군(將軍)은 안승구(安承龜) 민병옥(閔丙玉) 조형원(趙亨元) 김찬수(金燦洙) 등과 함께 이에 필요한 군자금(軍資金)을 조달(調達)하다가 일제(日帝)에 피검되어 1911년 2월부터 2년 6개월간 서울의 서대문(西大門) 형무소(刑務所)에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출옥(出獄)후(後) 고향(故鄕) 홍성(洪城)에서 다시 체포되어 10개월간 일제헌병부대에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이 주도(主導)하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가 조직(組織)되자 장군(將軍)은 이에 합류하여 이석대(李㙽大)의 뒤를 이어 부사령관(副司令官)으로 활약(活躍)하였으며 1917년 9월에는 총사령관(總司令官) 박상진(朴尙鎭)의 명(命)을 받고 중국(中國) 동북지방(東北地方)에서 무장독립전쟁(武裝獨立戰爭)을 수행할 요원(要員)을 양성할 목적(目的)으로 망명(亡命)하여 목단강지역(牧丹江地域)에 독립군사관학교(獨立軍士官學校)를
설립함으로써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무장투쟁(鬪爭)에 투신(投身)하였다. 또한 장군(將軍)은 김교헌(金敎献) 등 36인(三十六人)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지도자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여 내외(內外)에 조국(祖國)의 독립(獨立)을 선포(宣布)하였다. 그리하여 장군(將軍)은 무장독립군의 조직과 독립전사의 군사교육(軍事敎育)을 강화(强化)하는 등 항일무장독립전쟁을 영도(領導)하게 되었다. 1919년의 3.1운동(三一運動) 이후 이상룡(李相龍), 조성환등이 조직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의 참모로 활약하던 장군(將軍)은 서일(徐一)을 중심(中心)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단)이 조직됨에 그 사령관직(司令官職)을 맡았다. 같은 시기(時期)에 상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어 해외(海外)에서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중핵을 이루게 되면서 군정부(軍政府)로 개명되었던 대한정의단계열의 독립군(獨立軍)을 규합하여 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총사령(總司令)이 되어 간도왕청현에 독립군(獨立軍) 본영(本營)을 개설하였다. 1920년 2월에는 사관련성대의 교장직(敎長職)을 맡아 300여명(三百餘名)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가 하면 일개연대의 병력(兵力)을 가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편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만주에서의 무장독립군의 전력(戰力)이 날로 강화(强化)되자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된 일제(日帝)는 만주의 중국군벌(中國軍閥)과 야합(野合)한 후 2개사단의 병력(兵力)을 간도지방(間島地方)에 투입(投入)하여 군사작전(軍事作戰)을 펴게 되었다. 이때에 장군은 이범석 장군 등 1천8백여 독립군을 이끌고 1920년 10월 화룡현의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과 천수평(泉水坪) 일대(一帶)에서 5일간(五日間) 격렬한 전투를 벌여 무장독립전쟁역사상(獨立戰爭歷史上) 최대(最大)의 승리인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을 거두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日本軍)이 대부대를 동
원하여 한인(韓人)들에게 대한 보복학살을 자행하자 장군(將軍)은 막하 장병을 이끌고 소만국경(蘇滿國境) 지대(地帶)의 밀산(密山)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때 십여개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組織)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을 겪고나서는 북만주(北滿洲)로 이동하여 동령현을 근거로 흩어졌던 독립군부대를 수습하고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다시 조직(組織)함으로써 전력(戰力)을 강화(强化)하였다. 1925년에 이르러 북만주(北滿洲) 지대(地帶)의 여러 독립운동단체(獨立運動團體)가 신민부(新民府)로 통합(統合)되자 장군(將軍)은 군부위원장겸총사령관(軍部委員長兼總司令官)의 중책(重責)을 맡고 목성현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設立)하여 부교장(副校長)으로서 독립군 간부교육에도 관계하였으며 1927년에는 이중삼(李重三)등의 특수공작대을 국내(國內)에 침투시키기도 하였다. 신민부(新民府)에 내분(內紛)이 일게 되자 장군(將軍)은 김승학(金承學) 김동삼(金東三) 등과 혁신의회를 따로 조직(組織)하고 유일독립당재만영진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1929년(一九二九年) 7월(七月) 길림(吉林)의 국민부(國民府)와 더불어만주(滿州)에서의 한민족통합(韓民族統合)을 추진(推進)하여 해림(海林)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結成)하고 주석(主席)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장군(將軍)은 장기(長期)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의 역량강화(力量强化)와 국내진격작전(國內進擊作戰)을 펴기 위한 준비에 박차(拍車)를 가(加)하였다. 백두산(白頭山) 기슭 산림지대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영농법을 지도하여 재만동포(在滿同胞)들의 민주안전(民主安全)을 꾀하고 무장독립전쟁의 물질적(物質的) 기반을 강화(强化) 하기에 힘쓰는 한편 동포사회(同胞社會)의 분열(分裂)을 야기하던 공산주의(共産主義)에 대한 비판활동을 병행한 것 등은 그 일환이었다. 이처럼 항일무장독립전쟁의 기반조성과 민족단결(民族團結)에 진력하며 국내진격작전을 준비해오던 장군(將軍)은 1930년 1월 24일 음 1929년 12월 25일 북만주(北滿洲) 해림(海林) 중동(中東) 노산시점(路山市岾)에서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 박상실(朴相實)의 흉탄(凶彈)에 의해 41세(四十一歲)를 일기(一期)로 조국광복운동(祖國光復運動)의 지도자(指導者)요 무장독립전쟁의 영도자(領導者)로서의 일생(一生)을 마쳤다. 장군(將軍)의 장례는 장군(將軍)을 모시던 재만동포(在滿同胞)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엄숙하게 집행(執行)되었고 이억땅 만주(滿洲)에 안장(安葬)되었다. 그러나 그후 장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방물장사를 가장(假裝)한 미망인(未亡人) 오숙근 여사(女史)에 의해 비밀리에 수습되어 홍성군(洪城郡) 서부면(西部面) 이호리(利湖里) 선영(先塋)에 모셔졌다가 광복 후(光復 後)인 1957년(一九五七年)에 오숙근(吳ㅇ根) 여사(女史) 별세(別世)하자 현묘소인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소面) 재정리(才井里)로 합장(合葬)되었다. 우리 정부(政府)에서는 청사(靑史)에 길이 빛난 장군(將軍)의 무장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 지도자(指導者)로서의 공훈(功勳)과 숭고(崇高)한 민족정신(民族精神)을 높이 선양(宣揚)하여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建國勳章 大韓民國章)을 추서(追叙)하였다. 일찌기 소년가장시절(少年家長時節)에 사회개혁(社會改革)의 의지(意志)를 실천적으로 드러냈고 국운(國運)이 가물거리던 한말(韓末)에는 애국계몽운동에 열과 힘을 다하
였으며 그후 반평생(半平生)을 두고 이역땅에서 오로지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의 지도자(指導者)로 헌신한 장군(將軍)의 생애는 파란만장의 우여곡절을 거듭한 것이기에 몇 줄의 글로써 그 공적(功績)을 엮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나 후생(後生)들이 장군(將軍)의 여덕과 공훈을 가슴에 기려 헌양(顯揚)하도록 감히 이를 간추려 적어서 추원(追逺)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원순 근찬
안동김씨 대종회 회장 김응현 근서
홍성군수 이기정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