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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유형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370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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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일 두일리 장날에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1일은 두일리 장날로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구금룡 등의 주도로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정현수는 면장 윤규영(尹圭榮)에게 같이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고, 인근 집의 문을 돌로 두드리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라”고 독려하였다. 또한, 구금룡은 소방용 경종을 쳐 100여 명의 군중을 집합시켰다. 이어 이들은 시장 부근의 백학면사무소로 몰려가서 직원들에게 독립만세를 같이 부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호응하지 않자 정현수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였다.

조우식(미상~미상), 정현수(1899~1951), 이낙주(1896~1923), 홍순겸(1892~1953), 한상혁(1877~미상), 김문유(1894~미상), 구금룡(1896~미상), 김복동(1889~미상), 백천기(1880~1951)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조우식은 장날인 21일 두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구금룡이 동지를 포섭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21일 시장으로 간 조우식은 구금룡에게 소방용 경종을 울려 장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장꾼들이 모여들자 조우식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때 정현수는 인근 동리의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인 다수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몰려 들어갔다.정현수와 이낙주는 백학면장을 데려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등은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응하지 않자,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이들은 제지하는 헌병을 뿌리치고 시위를 계속하며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였다. 마전리에서 태극기를 만든 조우식, 홍순겸 등은 향교로 가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통구리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을 규합하던 백천기는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세하였고, 시위 후 결국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1919년 7월 7일 정현수는 징역 2년, 구금룡, 이낙주는 징역 1년 6월, 김복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18일에 조우식은 징역 3년, 홍순겸, 한상혁, 김문유는 징역 1년 6월, 백천기는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에게, 1995년 구금룡에게, 2011년에 조우식, 한상혁에게, 2016년 김복동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홍순겸에게, 1985년 이낙주에게, 1992년 백천기에게 추서했고, 2013년 김문유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탐방로그

두일리 장터 만세 시위지 안내판을 찾기 위해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370에 왔다. 시위지였던 두일리 장터는 도로 개설 등으로 인해 없어졌다. 부근에는 연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물정보

성명
구금룡
한자명
具今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미상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21 서울 및 전국 각지의 만세시위 운동에 호응하여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장날을 이용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등에서 격렬한 시위를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문유
한자명
金文裕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미상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3

공적개요

1919년 3월 21일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시장에서 조우식(趙愚植)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200명의 군중과 함께 동군(同郡) 미산면(嵋山面) 마전리(麻田里)까지 태극기를 앞세우고 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복동
한자명
金復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미상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6

공적개요

1919년 3월 초순 경기도(京畿道)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장날에 조우식(趙愚植)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찬성하여 동월(同月) 21일 구금룡(具今龍) 등과 함께 군중에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백천기
한자명
白天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0 ~ 1951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21 밤 경기도(京畿道) 연천군(連川郡) 백학면(白鶴面) 통구리(通口里)에서 주민(住民) 60여명을 규합,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시위군중을 이끌고 마전리(麻田里)로 가 두일리(斗日里)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낙주
한자명
李洛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23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21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장터에서 다수 군중(多數群衆)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동(主動)하여 백학면사무소(百鶴面事務所)로 몰려가서 면장(面長)과 직원(職員)들의 합세(合勢)를 강요(强要)하며 시설물(施設物)을 파괴(破壞)하고 동일(同日)밤까지 계속하여 마전리(麻田里)에서 만세 시위 활동 중(萬歲示威活動中)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6월형(月刑)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현수
한자명
鄭賢秀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51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21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장날에 조우식(趙愚植) 이낙주(李洛周)등과 함께 인근주민(隣近住民)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주도(主導)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조우식
한자명
趙愚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미상 ~ 미상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3월 21일 경기(京畿) 연천군(蓮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한상혁
한자명
韓相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7 ~ 미상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3월 21일 경기(京畿) 연천군(蓮川郡) 백학면(百鶴面) 두일리(斗日里)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홍순겸
한자명
洪淳謙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53
본적
경기도 연천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31 연천군(漣川郡) 백학면(百鶴面) 독립만세’(獨立萬歲) 시위운동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19.9.18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은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