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애국지사 공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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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이천시 관고동 418-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유남수(柳湳秀) 1905 ~ ?
서울 출생으로 15세떄 이천읍 중리로 이사하여 이천보통학교를 나왔다. 1926년 조선일보 이천지국 기자로 근무하던 중 친구인 이수흥이 주만참의부 특파 공작원의 사명을 띠고 찾아오자 형 유택수와 함께 이수흥을 도와 기내 4대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해 11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현국(金顯國) 1905 ~ 1946
독립운공가. 장호원 노탑리 출생으로 1928년 봄부터 무정부주의를 표방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2월 문예운동사라는 항일단체에 가입하여 할동하다가 그 해 5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역시 항일 단체인 자유연합사를 조직하여 주간으로도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나기창(羅基昌) 1922 ~
신둔면 수하리 출생. 경기공과학교에 재학중 방학기간이면 농촌 청소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계몽하였다. 1942년 4월 경상남도 도청 산림과 재직중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동지들을 모아 중국 상해로 망명을 추진하다가 부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 3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기주(金基周) 1924 ~ ?
백사면 출생. 광복군의 일원.
1940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어 중국 호남성에 배치되었으나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부대를 탈출, 중국 중앙군 유격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중경에 있는 광복군 총사령부 보충대에 입대하여 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박영순(朴英淳) 1925 ~
안성군 출신으로 11세 때 부친을 따라 장호원읍으로 이사하여 장호원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9년 장호원에서 14명의 소년들로 독수리 소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으로 단원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42년 2월 장호원 시내 곳곳과 시내버스에 조선독립과 민족단경을 호소하는 벽보를 붙이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이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충효동산 건립취지문
우리 이천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세력확장을 위해 싸우던 각축장이었으며, 고려,조선시대와 한말을 거치면서 수많은 충신과 효자,효부,열녀,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입니다.
단신으로 적진 깊숙이 들어가 담판한 서희 선생이나, 신미양요때 장렬하게 산화한 어재연장군, 신출귀몰한 전력으로 일제를 놀라게 한 이수흥 의사등 대의에 살다간 분들은 물론이러니와 하늘이 낸 박효자, 유효자,정열녀등은 이천을 빛낸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이천의 자랑이 무엇인가? 흔히 싸을 비롯한 농,축산물이나 도자기, 온천을 거론하고 있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혼이며,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자원이 있어도 정신적 뿌리가 없으면 발전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천의 역사를 온고하면서 이천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니 충효열에 빛나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충효의 동산이 조성된 설봉공원은 역사적으로 삼국통일의 발판지로서, 2001년에는 이천시민의 정성을 모아 세계도자기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곳이며, 배산임수의 자연적조건과 선열들의 넋을 모신 현충탑이 있어 가히 이천의 성지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명소를 택하여 우리 후손드은 이곳에서 조상의 빛난 얼을 되새기고, 스스로 인격을 수양하여 이곳에 기록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월남참전기념탑을 찾기 위해 찾아보았던 대한민국 무공수훈자 공적비 옆에 있는 충효동산에서 애국지사라는 글자가 보여서 탐방을 시작했다.
이천의 22분의 애국지사의 공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었다.
구연영(具然英) 1864 ~ 1907
독립운동가이며 종교인, 서울출생. 1895년 김하락등과 이천에 와서 의병들을 규합하여 화포군 1,000여명으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여 중군장으로 1896년 1월 넓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려 대승을 거두었다.
전기 의병운동이 실패한 뒤 기독교에 입문하여 전도사가 되었고 1905년 이천교회의 책임자로 부임하여 선교활동과 함께 구국회를 조직하여 비폭력 독립운동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1907년 7월 이천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봉기(金鳳基) 1866 ~ 1908
한말 의병장, 신둔면 남정리 출생으로 1907년 8월 주창룡, 신규희등과 함께 군포수등을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8월 15일 음죽군 순사분파소 습격을 시작으로 이천읍 순사분파소와 우편 취급소 습격등 이천.광주.여주.양평 지역을 무대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서울로 잠입했다가 동족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08년 5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임형순(任馨順) 1870 ~ ?
한말 의병장. 백사면 송말리 출생
1907년 고향 송말리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이천창의소를 결성하여 원적산을 근거지로 삼아 광주.양지.양평.여주 등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남한강에서 군량미를 운반하는 적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타격을 주기로 하였다. 일본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부대를 제천방면으로 퇴각했으나 그 후 행적을 알 수가 없다.

보훈처 공훈록과 약가의 상이한 내용이 있다.
임형순(任馨順, ~1908)은 의병장으로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및「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시기에 임형순을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1907년 이후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1908년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끝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전덕기(全德基) 1875 ~ 1914
김리교 목사이며 독립운동가. 이천읍 출생. 1896년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조약 무효 투쟁을 전개하고 이준과 더불어 헤이그 밀사파견을 사전모의하리도 하였다.
안창호와 함께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1912년 소위 '105인 사건'의 주동인물 중 한사람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고문의 후유증으로 별세하였다.
상동교회 담임목사로 초기 기독교 운동과 함꼐 공옥학교와 상동청년학원을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도 주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박정심(朴正心) 1877 ~ ?
한말의병으로 음죽군 사람. 방인관의병부대에 가담하여 1907년 8월 충북 죽산과 강원도 원주 등지에서 일본군 수배대와 교전하는 등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유형 5년형을 받고 수형생활을 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윤순채(尹順采) 1881 ~ ?
한말의병. 설성면 제요리 사람으로 질그릇 행상을 하던 중 1909년 의병장 한봉서의 권유로 의병에 가담하여 청주.진천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 후 체포되어 유형 10년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박경채(朴慶彩) 1886 ~ ?
한말의병. 음죽군 사람으로 당시 직업은 농업. 1907년 8월 방인관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여주.안성.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의 습격으로 부대원들이 흩어지자 서울로 피신했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유형 10년형을 선고받고 수형생활을 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구정서(具禎書) 1882 ~ 1907
구연영의 장남. 부친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교회운동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울동문안교회 담임으로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청년운동과 구국운동을 하다가 1907년 이천에서 부친 구연영 전도사를 도와 구국회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벌이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부친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에 체포되어 1907년 7월 순국하였다.
1991년 국민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원조(金遠祚) 1885 ~ 1923
독립운동가. 율면 총곡리 출생.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그 후 만주로 망명하어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국냐에 독립단 연락기관을 설치할 목적으로 1920년 서울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형사대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3년 4월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유성근(柳聖根) 1878 ~ 1942
독립투사로 율면 월포리 출생. 강원도와 함경도 광산에서 일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시켰다. 1920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만주로 건너가서 대한독립야단 모험국장이 되었다. 이 해 10월 부하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등 독립운동을 하다 1921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2년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이기룡(李起龍) 1885 ~ 1952
임시정부 요인이며 독립운동가로 부발읍 출신. 3.1운동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조완구, 신익희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 8인의 한 사람으로 선촐되어 임시헌법과 의정원법 제정을 위해 활약하는 등 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지는데 공헌하였다.
해방이 되던 1945년 2대 이천군수를 지냈고,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민특위 경기지구 위원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종설(朴鍾卨) 1888 ~ 1947
마장면 관리 출생. 1919년 이창호등과 동민들을 모아 장날인 3월 30일 오천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오천리 만세운동에는 1천명의 많은 동민들이 참가했으며 이후 2~3일간 마장면 각 마을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마장면 시위운동의 주동인물로 체포되어 징역 5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표창이 추서 되었다.
이상혁(李商赫) 1893 ~ ?
신둔면 수하리 사람으로 신둔면 만세운동의 중심인물 중 한사람. 1919년 3.1운도이 일어나자 서기창과 함께 동지들을 규합하여 4월 1일 신둔ㅁ녀 사무소 앞에서 500여명의 면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시위 주동인물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한석동(韓石東) 1893 ~ 1933
모가면 서경리 사람으로 농업에 종사. 같은 마을에 사는 권중효와 함께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 150여명을 이끌고 인근 응봉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 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권중효(權重孝) 1895 ~ ?
모가면 서경리 사람으로 농업에 종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기창, 이상혁등이 주도한 신둔면 만세시위를 위한 사전모임에 참가하였다.
4월 2일 저녁 서경리에서 마을 사람들 150여명을 이끌고 근처 응봉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1990년 국민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수흥(李壽興) 1905 ~ 1929
독립투사. 창전동 출생으로 이천공립보통학교를 나왔다. 192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 장군이 세운 신명학교를 나온 후 주만참의부 특무정사가 되었다.
1926년 5월 군자금 모집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고향으로 내려오던 중 동소문파출소를 습격 일본경찰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 후 이천읍에서 유택수, 남수 형제의 도움으로 거사를 준비하여 안성군 사건, 백사면 사건을 연달아 일으켜 일본경찰이 총동원령을 내리게 하였다.
동족의 밀고로 이천읍에서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1929년 2월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있다.
유택수(柳澤秀) 1902 ~ 1929
독립투사. 당시 이천읍에서 자동차부 조수로 일하던 중 동생의 친구인 주만참의부 특무정사 이수흥에게 감화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6년 9월 이수흥과 함께 안성군사건을 일으키고 10월에는 단독으로 수은동사건을 일으키는 등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이다 이수흥과 함께 체포되어 사현언도를 받고 1929년 2월 29세의 한창나이에 순국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