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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중앙근린공원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조형물 | 안내판·표지석 | 동상·부조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횡성중앙근린공원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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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강만형
한자명
姜萬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20
본적
강원도 원주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19. 3. 27 강원도 횡성군(橫城郡) 횡성(橫城)장터에서 300여명(餘名)의 시위 군중(示威群衆)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아 복역(服役) 중(中) 옥중사(獄中死)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강승문
한자명
姜勝文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19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3.1운동시(運動時) 강원도(江原道) 횡성군(橫城郡)에서 참여(參與) 독립만세 시위중(獨立萬歲示威中) 일 헌병(日憲兵)의 발포(發砲)로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신재근
한자명
申在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56 ~ 미상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2

공적개요

1919. 3. 10경(頃) 강원도(江原道) 횡성군(橫城郡) 횡성면(橫城面) 영영포리(永永浦里) 자기 집에서 장도훈(張道勳)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논의하여 장도훈(張道勳)에게 자금으로 금 3원을 교부하여 서울에서 태극기 및 독립선언서 수십매를 구입하게 하고, 3월 27일 횡성(橫城)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 시위를 주도하여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을 받은 사실(事實)이 확인(確認)됨.

인물정보

성명
안승훈
한자명
安承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75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27 횡성군(橫城郡) 횡성(橫城)장터에서 천도교인(天道敎人)을 중심(中心)으로 주민(住民) 다수(多數)를 규합(糾合)하고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선도(先導)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合算)하여 11월 4일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안승훈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해경
한자명
鄭海璟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7 ~ 1926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19년 4월 강원도(水原道) 횡성군(橫城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천선재
한자명
千善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41 ~ 미상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2

공적개요

1919. 4. 8~10. 강원도(水原道) 영월군(寧越郡) 법흥리(法興里)의 최춘일(崔春日)을 비롯하여 최성오(崔成五), 현성준(玄聖俊)을 찾아가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오는 주천리(酒泉里) 장날에 장터에서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자고 권유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事實)이 확인(確認)됨.

천선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양옥
한자명
崔養玉
운동계열
중국방면
생몰년도
1893 ~ 1983
본적
강원도 원주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929년에 동지(同志) 김정연(金正連)과 비밀결사(秘密結社)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여 일정(日政) 시설 파괴(施設破壞)를 계획(計劃)하든중 동년(同年) 4월 20일 서울교외(郊外) 망우리(忘憂里)에 대기하다가 춘천(春川)으로 수송하는 우편 자동차(郵便自動車)를 권총(拳銃)으로 위협, 정지시킨 후 우편물(郵便物)을 전부 해체하여 한인(韓人) 우편물(郵便物)만 가려놓은 후 다른 것은 즉석(卽席)에서 소각(燒却)한 후 유유히 떠나 갔다 일경(日警)은 경기(京畿), 황해(黃海), 강원(江原), 충남(忠南), 충북(忠北) 5도(道)의 무장 경찰 기동력(武裝警察機動力)을 총동원하여 양주산(楊洲山)을 포위하고 일주야(一晝夜) 고전 끝에 피체(被逮)되어 징역 11년에 처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최종하
한자명
崔宗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22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3.13. 강원도(水原道) 횡성군(橫城郡) 횡성읍내(橫城邑內)에서 천도교(天道敎) 횡성군(橫城郡) 대교구장(大敎區長)으로 있으면서 독립만세 시위 운동(獨立萬歲示威運動)을 거사(擧事)하기 위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10여매(餘枚)를 제작(製作)하여 김인경(金麟卿)에게 갑천리(甲川里) 둔둔리(屯屯里) 정곡리(井谷里) 등에 배부(配付)하도록 교부(交付)한 후(後)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탁영재
한자명
卓英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7 ~ 1941
본적
강원도 횡성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27 강원도(水原道) 횡성(橫城)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에 참여한 후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에 가입(加入)하여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의 지원활동(支援活動)을 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탁영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하돌임
한자명
河乭任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8 ~ 1919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14

공적개요

1919년 4월 1일 강원도(水原道) 횡성군(橫城郡) 횡성시장(橫城市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순이
한자명
金順伊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78.10.15 ~ 1952.12.19
본적
경상북도 경주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

공적개요

김순이 여사는 1878년 10월 15일 경주읍 서부리 김해김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1898년 10월 19일 안흥면 안흥리에서 박영화 씨와 결혼하여 횡성읍 옥동리와 갑천면 구방리를 거점으로 가난과 세파에 시달리면서 애국의 일념으로 생활하시다가 1952년 12월 19일 한 많은 삶을 마치셨다. 기골이 장대한 여사의 별명은 황소아주머니였는데 당시 천대받던 주막을 경영하면서 푼푼이 벌은 돈으로 애국지사이신 갑천면 화전리 최양옥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자금 모금에도 협력하였다. 특히 3.1운동 때에는 자신의 주막을 모의 장소로 제공하여 하영현, 강달회, 강성순, 전한국, 강만형의사가 순국하시고 많은 지사가 투옥되었던 4월 1일 횡성 장날 독립만세사건 때에는 일경에 쫓겨 장터 술집에 숨어 든 동지를 규합 군중을 진두지휘하다 투옥되었다고 한다. 자손은 절손되고 난중에 소실된 기록을 챙기는 후사가 없어 찬연한 공적에도 보훈의 대열에 들지 못하고 갑천면 구방리 공동묘지에서 실묘의 지경에 이른 것을 안타깝게 여긴 횡성군민들이 1990년 비석을 세웠다.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