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중앙근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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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횡성군 횡성읍 읍하리 40 횡성중앙근린공원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강만형 | (1887~1920) 건국훈장 애국장, 원주 소초면 둔둔리 출생

횡성천도교 강도영 교구장의 아들로, 부친이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청일면 춘당고개에서 전사하자 그를 계승하여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하며 횡성읍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27일 최종하 등 4명과 함께 60여 매의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제작하여 시장에 모인 300여명의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세운동을 이끌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으로 1920년 2월 28일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정해경 | 횡성 출생

횡성읍 내지리 출신으로 1919년 4월 1일 횡성읍 장날의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는 감리교인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1천3백여 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이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1년6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강성순 | (1893~1919) 대통령 표창, 횡성 출생

우천면 법주리 출신 천도교인이다. 1919년 4월 1일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횡성군민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가 장에 가서 만세운동에 합류한 것을 보고 만류하던 사람들에게 "죽음이 무서워 만세를 부르지 못하면 어떻게 나라를 찾겠느냐"며 호통을 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다. 밤까지 이어진 만세운동에 함께 하다가 일본 헌병들이 발포한 총탄에 맞아 순국했다. 우천면 법주리 바라골에 그의 묘소가 있다.
최양옥 | (1893~1983) 건국훈장 독립장, 횡성 출생

양반가의 장자로 출생하여 호의호식하며 학업에 전념하다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제가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14세의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서울 중동중학교 재학 중에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중퇴했다. 이후 만주에서 돌아온 독립운동가 신덕영을 만난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 발발 직후 고향인 횡성에 내려와 천도교인들과 합세해 횡성 4.1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부터 139년 사이 17년간의 옥고를 치르면서 대동단원, 공명단장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갑천면 전촌리에 묘소가 있다.
김순이 | (1878~1952)

경주에서 태어나 횡성으로 시집온 김순이 여사는 30대에 남편과 사별햇다. 이후 주막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횡성 4.1만세운동을 준비하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장소로 주막을 제공했다. 4월 1일 횡성만세운동에도 적극 가담해 일경 주재소를 파괴하기도 했으며, 일경의 총소리에 놀라 부근 술집으로 들어가 숨는 남자들을 보고는 부엌칼을 들고 들어가 위협하며 시위현장으로 내몰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드문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전한국 | (?~1919) 횡성 출생

전한국은 횡성읍 읍하리에 살았고, 3.1운동 당시에 수로공부로 일하고 있었으며, 횡성의 만세운동에 참가. 1919년 4월 1일 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을 외치다가 일본헌병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 순국하였다.
천선재 | 안흥 출생

그는 일찍이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그가 거주하던 영월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여러 마을을 순회하며 힘을 모으려고 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주천장날을 거사일로 계획하고 4월 8일에는 법흥리의 최춘일의 집에서 그리고 9일에는 양변면 신일리 최성오의 집에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선동하였다. 또 10일에는 수주면 무능리에서 현성준에게 만세운동을 권고하며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하영현 | (?~1919) 건국훈장 애국장, 소초면 둔둔리 출생

소초면 둔둔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27일 횡성장터 만세운동을 이끈 강만형 애국지사가 일본헌병에 체포되자, 이에 격분하여 둔둔리 주민들을 인솔해 같은 해 4월 1일 횡성만세운동을 벌이던 중 순국했다. 그의 묘소가 횡성읍 모평리에 소재해 있다.
김치정 | (?~1919) 횡성 출생

갑천면 매일3리 속칭 잔골마을에서 50대의 장년으로 한문서당을 마련해 놓고 10여명의 문하생을 두고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생이었던 김치정은 횡성 4.1만세운동 당시 수많은 군민들이 횡성읍내 장터로 모여들 때 잔골에서 제자 신건수를 대동하고 횡성으로 와서 만세를 부르는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수가 점점 많아지고 열기가 거세지며 군중의 선두가 헌병분견소를 향해 움직이는 것을 본 일본헌병들이 무차별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는데 김치정은 이때 총탄에 맞아 만세를 부르던 현장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윤태환 | 횡성 출생

신재근, 장도훈이 계획하여 추진한 1919년 3월 27일 횡성읍 장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27일 횡성시장에서 신재근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자 승낙하였다. 그는 다른 주동인물들과 함께 시장 내의 모든 상점을 닫게 하고 사람들을 집합하여 300여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윤태환 | 횡성 출생

신재근, 장도훈이 계획하여 추진한 1919년 3월 27일 횡성읍 장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27일 횡성시장에서 신재근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자 승낙하였다. 그는 다른 주동인물들과 함께 시장 내의 모든 상점을 닫게 하고 사람들을 집합하여 300여명의 군중에 앞장서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재근 | (1856~?) 건국훈장 애족장, 횡성 출생

횡성천도교 봉훈(奉訓)으로 교인들을 이끌던 그는 교주 손병희로부터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횡성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1919년 3월 10일 자신의 집에서 장도훈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구입자금으로 3원을 주었고, 이 돈으로 구입한 태극기 20매와 독립선언서 40매를 횡성에 배포했다. 1919년 3월 27일 횡성장터에서 300여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시작했으나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일경과 원주에서 파견된 기마병 7명에 의해 해산되고, 그는 체포돼 2년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가 횡성에서도 1919년 3월 27일, 4월 1일, 4월 2일, 4월 12일 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강원도 3.1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왜경의 총칼에 많은 희생자를 낸 1919년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1세기가 흘렀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아픈 역사의 교훈으로, 힘을 합쳐 희망찬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 목숨 바쳐 싸운 애국선열들에 대한 보답이다.
4.1만세운동의 약사

3월 10일 - 상안흥리 천도교인 장도훈과 영영포리 신재근이 횡성만세운동 결의
3월 11일 - 장도훈이 상경, 횡성 출신 이동구와 만나 대형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40매 구입.
3월 16일 - 고종황제 서거를 애도하는 횡성보통학교 학생들 상장(喪章) 패용 등교로 휴교령
3월 26일 - 주동자들이 신재근 집에서 책임자를 정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배포 결정
3월 27일 - 횡성장터에서 신재근, 장도훈, 안경춘, 강만형 등이 태극기를 배포하고, 읍하리 청년 윤태환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300여명과 만세시위를 시작. 일제의 사전조치로 천도교인 8명 포함, 12명이 검거되면서 실패. 이후 횡성천도교 대교구는 횡성청년회, 횡성감리교회와 협력해 치밀한 사전준비로 다음 만세운동에 대비.
4월 1일 - 횡성장날. 아침부터 상점 문을 미리 닫은 상인들과 장꾼 등 수천명의 군중들이 모여들며 만세운동 전개. 날이 저물자 장터에 다시 모인 사람들이 헌병분견소로 향하자 일본 헌병들이 군중들을 향해 총격. 하영현, 강성순 등 5명이 현장에서 숨지고 부상자 속출, 강원도 장관은 시위자가 1,300명에 달했다고 총독부에 보고
4월 2일 - 주민 200여명이 헌병분견소 앞에서 독립운동 허가와 구속자 석방요구 시위, 일제에 항거의 표시로 4월 6일까지 횡성시장 철시
4월 6일 - 횡성시장 철시로 무언의 저항 계속
4월 7일 - 길가에 태극기와 함께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선전문 게시
4월 12일 - 서원면 분일리에서 송병기, 성태현, 박민희 등이 주도해 만세운동 전개, 이날까지 횡성에서만 연인원 5,000여명이 만세운동에 참여
함성이 들리는 역사의 현장

횡성장터 - 횡상정은 100년이 넘는 역사와 함께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장으로 '동대문 밖에서 가장 큰 장'으로 유명했다. 특히,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가고 있는 가운데 4월 1일 도내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으로 횡성군민과 장꾼 1,300여명이 일시에 외치는 만세 함성으로 횡성군민의 기개를 떨친 곳이다.

헌병분견소 터(삼일공원 주차장) - 이곳은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 당시 헌병분견소가 있던 곳이다. 장터에서 시작한 만세운동 군중들은 밤이 되면서 이 곳 헌병분견소로 몰려왔다.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순국 터(군청 뒤 느티나무) - 이곳은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 당시 헌병분견소로 가는 길목으로, 일본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5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횡성면사무소 터(소망약국 자리) - 이곳은 1919년 4.1 만세운동 당시 횡성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일본헌병의 총탄에 맞아 숨진 시위대의 시신 일부가 군의회 위 느티나무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밤새 방치되었다. 당시 횡성면 서기 박순기씨가 다음날 아침 광목을 사서 시신을 옮겼는데 피가 땅속까지 스며들었다고 한다.

횡성초등학교 - 횡성초등학교는 1911년 6월 공립횡성보통학교로 개교했다. 1919년 3월 18일로 예정된 6회 졸업식이 끝나면 곧바로 횡성군청 뒷산으로 올라가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햇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해 1월 22일 승하한 고종황제를 애도하는 표시로 3월 16일부터 상장(喪章)을 달고 등교하기로 하고 전교생에게 연락해 실행에 옮기면서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횡성감리교회 - 횡성감리교회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교회이다. 1919년 4월 1일 당시 교인들은 천도교인들과 함께 횡성군민만세운동에 적극 나섰다. 독립만세운동은 종교와 학연, 지연을 떠나 횡성군민 모두가 하나임을 보여주었다.

횡성천도교 대교구 - (횡성천도교 대교구는 횡성읍 읍하리에 있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고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음) 1919년 4월 1일 횡성군민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듯 횡성천도교 대교구에는 태극기가 높이 솟았다.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횡성천도교 대교구 최종하 교구장을 비롯하여 신재근, 강만형 등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김순이 여사 주막터(횡성읍 옥동리) - 이곳은 횡성의 여성독립운동가 김순이 여사가 운영하던 주막터다. 김순이 여사는 1919년 3월 초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횡성에 독립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김여사의 주막을 찾아든 천도교인 이채일을 만나고, 이어 독립운동가 최양옥도 주막에서 만나 그를 적극 돕기로 하면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김순이 여사는 주막을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하고, 독립자금을 후원하기도 했으며, 4.1 만세운동에도 선봉에 서서 만세를 불렀다.

횡성군 마지막 만세운동지(서원면 분일리) - 서원면 분일리는 지금의 원주시 호저면 매호지로 4.1 횡성군민만세운동은 3월 27일부터 시작해 4월 1일 정점을 찍고 계속되다가 4월 12일에 이곳에서 마지막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송병기 등이 주도해 70여명의 주민들은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고, 이 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들이 합세해 수가 더해지고 시위대는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며 새벽 1시까지 독립만세를 불렀다. 횡성군민만세운동의 마지막 함성이었다.
3월 27일 검거된 주동급 애국지사

신재근(申在根) - 당시 64세로 횡성 영영포리 441번지에 살았는데 횡성천도교의 봉훈(奉訓)으로서 천도교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며 횡성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징역 2년,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안경춘(安敬春) - 안승훈(安承勳)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20세로서 안흥면 상안리 641번지(배나무골)에 살았다. 그는 장도훈과 김인경에게서 글을 배운 청년으로 8개월의 징역을 마친후 고향으로 돌아와서 살다가 1975년에 작고하였다. (징역 10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강만형(姜萬馨) - 당시 33세로서 원주 소초면 둔둔리 223번지에 살았다. 그는 구한말 의병으로 횡성 청일면 춘당고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강도영(姜道永)의 아들이라 반일 감정은 누구보다 강했다. 그러한 관게로 횡성 헌병분견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병중에 8개월의 징역을 살다가 1920년 2월 28일 서대문 형무소 옥중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윤태환(尹泰煥) - 당시 22세로 횡성면 읍하리 68번지에 살았으며 횡성 청년대장으로 3월 27일 제일 먼저 만세운동에 몸을 던졌다. (징역 6월)
4월 1일 순국한 애국지사

강달회(姜達會) - 강달회는 원주 소초면 둔둔리 출신으로 횡성 천도교를 다녔으며 당시 51세로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하영현(河永賢) - 하영현은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 출신으로 1919년 3월 27일 횡성만세운동을 이끈 강만형 애국지사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자 이에 격분하여 4월 1일 횡성만세운동을 벌이던 중 순국했다. (201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전한국(全漢國) - 전한국은 횡성읍 읍하리에서 살았으며 당시 수로공부(水路工夫)로 일하고 있었으며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강성순(姜聖順, 1893~1919) - 강성순은 횡성군 우천면 법주리 사람으로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 추서)

김치정(金治正) - 김치정은 갑천면 매일3리 잔골마을에서 한문서당을 마련해 놓고 10여명의 문하생을 두고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유생이었다. 스스로 참가하는 수 많은 군민들이 횡성읍내 장터로 모여들때 김치정도 제자 신건수를 대동하고 횡성으로 와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치정은 무차별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지만 잡히지 않으려고 그래도 현장에서 기어나와 그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다. 만세사건 후 진골마을로 김치정의 사망소식이 전달되어 진골마을 사람들이 횡성까지 나와서 시신을 몰래 운구, 일경의 눈을 피해 장사를 지냈다. 김치정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또 순국한 사실은 당시 일본 헌병이 두려워 남들에게 숨겨야 했으며 그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제자 신건수의 증언에 의하여 밝혀졌지만 보훈의 대열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김치정처럼 총상을 입고 몰래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 지 철저히 숨기고 비밀로 했기 때문에 알 길이 없다.
수형 애국지사

최종하(崔宗河, 1877~1922,) - 횡성읍 영영포리 살던 사람으로 일찍이 천도교에 몸담아 횡성 대교구장으로 횡성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징역 6월)

김인경(金麟卿) - 횡성군 안흥면 상안흥리 사람으로 서당훈도였으며 안흥리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징역 8월)

추병륜(秋秉倫) - 원주 소초면 교항리 출신이며 당시 45세로 횡성 천도교 교인으로 만세운동 연락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징역 6월)

정해경(鄭海璟) - 횡성군 횡성읍 내지리 사람으로 감리교인들을 이끌고 앞장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였다. (징역 1년 6월)

김성서(金聖西) - 영월군 양변면 주천리에 살았으며, 당시 68세의 천도교인으로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횡성군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군중을 동원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징역 1년 6월)

김윤신(金允信) - 인제군 서화면 천도리 출신으로 3.1운동 때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봇짐을 지고 물건을 파는 척 하면서 이마을 저마을을 다니면서 만세운동의 참여를 유도하고 격려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가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징역 8월)

김윤배(金允培) - 횡성군 갑천면 매일리 출신으로 횡성천 도교인이었다. 매일리 주민을 동원하고 솔선하여 만세를 불렀다. (징역 8월)
횡성 3.1운동 관련 비(非) 서훈(敍勳) 애국지사

윤동선(尹東先) - 윤동선은 횡성 영영포리에 사고 있었으며 당시 25세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총상으로 부상을 당하였다.

최동수(崔東壽) - 횡성 읍하리에 살던 청년회원으로 4.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을 해산시키려던 고지마료(小島了) 헌병 상등병을 우천면 두곡리 김진대 노인과 함께 말에 끌어내려 구타하고 탈출,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위하여 만주를 드나들었다.

김진대(金振大) - 우천면 두곡리 사람으로 일본헌병을 말에서 끌어내려 담뱃대로 때리며 호령하였다. 독립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탈출, 만주로 갔다.

김명기(金明紀) - 김진대의 아들로서 만세운동 추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일본헌병을 피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고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탁영재(卓英才) - 횡성감리교인으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항일비밀결사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뤘으며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위창래(魏昌來) - 당시 횡성 영영포리 구장이었다. 그는 당시 많은 친일 구장과는 달리 이 마을에서 있었던 3.1만세운동의 계획.추진의 비밀을 일본 헌병들로부터 발각되지 않도록 보장하고 지원하며 만세운동의 거사가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구국의 횃불 최양옥 지사
- 김성수

갑천면 대관대리 삼거리 가는 국도 옆에 서 있는 최양옥 지사 추모비 앞에 서면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며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갑천면 화전리에서 태어나신 지사는 기미년 3.1운동 당시 서울 중동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3.1운동의 의로운 열기 속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낙향하여 횡성 4.1만세운동의 주역이 되었으며 왜경의 추적을 피해 머나 먼 만주로 가서 애국의 일념을 불태웠나니 대한청년단, 공명단 등 애국단체에 몸담아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중 독립군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다시 조국에 돌아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젊음을 다 바치신 아아, 의로운 독립투사 최양옥 지사님! 대구형무소에서 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10년 그 외에도 수많은 고초를 겪으시면서도 구국의 횃불 높이 밝히신 한결같은 지사님의 애국 투혼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애국의 불길로 타 오르고 있다. 추모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으며 그날의 지사님 같이 소리쳐 불러본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 만만세!
최양옥 지사의 가족 및 누이의 고난의 길 최양옥 여동생 최양희 검거 - (동아일보 1929.07,06)

「경찰부 자동차로 활동」
「최양옥 친누이를 검거」
「공명단 사건 주범 최양옥의 누이가 해외 모 단체와 연락하여 대활동?」
「해이 모단과 연락 혐의」

세상을 놀라게 한 공명단 사건의 수범 최양옥의 친매 최양희라는 여자를 이일 아침 여섯시경에 경기도 경찰부원이 자동차를 타고 시내 동대문 밖 창신동 모의집을 포위하고 체포하여 자동차에 실고 돌아와서 엄밀 취조한 후 유치시키고 동부원들은 계속 활동중이라는 바 사건의 내용인 즉 비밀에 부쳐 탐문한 바에 의하면 동인은 개최될 조선박람회를 기회로 모중대 계획을 세우고 활동중인 외지 모단체와 연락을 취해준다는 정보를 받고 그와 같이 검거하는 동시에 대활동중이더라
최양옥을 잡으려 기관총까지 배치 - (동아일보 1929.04.22.)

「기관총까지 배치」
「매우 엄한 경계」

최양옥이 체부동 118번지에 있는 것을 탐지한 경관대는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권총과 장총을 휴대하였음은 물론이려니와 만일을 예방하기 위하여 그 부근에 기관총까지 장치하였다더라

「총을 맡았던 정항 태도 수상」
「행동이 의심을 살뿐」
「동거 학생도 검거」

시내 북일여관에서 유숙하고 있던 정항은 지난 3월 30일에 시내 중동학교 학생 의주군 가천면 가암리에 원적을 둔 신동범과 대구 부산 서정 31번지 안동수와 울진군 근남면 노음리 윤석효 등 세명과 한날한시에 여관에 들어와 한방에서 지냈었음으로 전기 학생들도 혐의자로 몰아 검거되었는데 신씨만 20일에 나왔으나 두명 학생은 아직까지 취조중이라더라

공명단원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 체포기사 - (중외일보 1929.04.22.)
검거된 후에도 당당한 모습의 최양옥 지사(좌측에서 두 번째) - (출처: 동아일보 1929.04.22)

최양옥의 옥중카드. 10년형 - (출처: 국가기록원)
공명단의 일본 우편물차 습격
당시 경성우편국 제7호 피해차량 - (출처: 동아일보 1929.04.18)

최양옥 지사 일행을 체포하러 떠나기 직전의 경관 결사대 - (출처: 동아일보 1929.04.22)
장래를 결심, 품은 뜻 말하고 이혼, 그리고 독립운동의 길로 떠나는 최양옥 지사

「장래결심하고 이혼후 출관」
「안혼한 생활을 못하겠다고 품은 뜻 말하고 이혼 후 출관」

별향권 총대의 수범 최양옥의 가정형편을 들으면 그의 집에는 자기 아내와 동생이 있을 뿐으로 그 아내에게 자기가 큰 뜻을 품고 해외로 건너갈 때에 자기의 장래가 도저히 안온한 가정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음을 설명한 후에 서로 이혼을 하겠다 하며 그의 아우 되는 최양길 씨는 재작년 칠월경부터 경성 연초 전매국 직공이 되어 지금까지 근무하는 중이라는데 그가 마치령 자동차 습격사건을 일으키자 경찰은 벌써 그의 정체를 알고 원주에 있는 그의 친척 고구의 집을 엄중히 경계하고 있었다 한다.
공명단 활동 보도기사(조선일보 1929.04.20.일자) 독립기념관 자료

1929년 4월 20일자 조선일보의 호외로, 공명단(共鳴團)이 서울 망우리 우편물 수송차량을 습격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공명단은 독립운동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1926년 중국 산서성 태원부에서 최양옥(崔養玉).김정련(金正連).이용화(李容華) 등과 조직한 항일운동 단체이다. 이들은 1927년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소요자금 모금과 국내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1929년 4월 20일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일본 우편 수송차를 기습하기로 하고 망우리(마석고개)에서 공격하여 현금을 날취하고 강원도 방면으로 은신하였다.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지점을 통과하는 모든 차량을 정차시키고 승객들은 모두 하차시켜 산속에 감금한 뒤에 도주하였으나, 일본경찰과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체포되었다. 최양옥은 징역 10년, 김정련은 징역 9년, 이선구는 징역 6년의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선구는 옥사하였다.
최양옥(1893.12.05.~1983.05.04.)

▶ 횡성 갑천면 화전리 출생
▶ 서울 중동중학교 학생(26세)으로 탑골공원 3.1운동에 참가한 후 중퇴
▶ 3.1운동 발발 직후 고향인 횡성으로 내려와 4.1 횡성군민만세운동 주도
▶ 대동단에 가입. 전남에서 군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수형(7년)
▶ 1926년 출옥. 독립운동 전념을 위해 이혼 후 1928년 만주로 망명
▶ 1928년 신덕영, 안창남 등과 함께 공명단 결성, 독립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어 10년의 옥고를 치름.
▶ 1980~1982년 선산이 있는 횡성군 갑천면 전촌리로 내려와 선친이 묘소를 오가며 마지막 효성을 다하고 1983년 음력 5월 4일 영면(永眠)
최양옥 지사
황소아줌마 김순이 여사 (1878~1952)
황소아줌마 김순이 여사 (1878~1952)

경주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98년 안흥면의 박영화와 결혼하였으며, 30대에 남편과 사별한 후 한치고개에서 주막을 차리고 남매를 키웠다. 6척 거구에 힘도 장사여서 주민들은 황소아줌마로 불렀다. 1919년 3월 초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횡성에 독립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김여사의 주막을 찾아든 천도교인 이채일을 만나고, 이어 독립운동가 최양옥도 주막에서 만나 그를 적극 돕기로 하면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횡성4.1만세운동을 준비할 때부터 거사일까지 적극 가담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52년 12월 19일 여사가 숨을 거두자 마을사람들은 갑천면 구방2리 공동묘지에 여사를 안장했으나 1990년 횡성군에서 한치 저수지 인근, 당시 김여사가 운영하던 주막 근처에 새로 안장하면서부터 선양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1972년 춘천교대 조동걸 교수에 의해 김여사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2013년 4월 '강원을 빛낸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황소아줌마 김순이 여사 (1878~1952)

경주에서 태어나 20세가 되던 해인 1898년 안흥면의 박영화와 결혼하였으며, 30대에 남편과 사별한 후 한치고개에서 주막을 차리고 남매를 키웠다. 6척 거구에 힘도 장사여서 주민들은 황소아줌마로 불렀다. 1919년 3월 초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횡성에 독립운동을 전파하기 위해 김여사의 주막을 찾아든 천도교인 이채일을 만나고, 이어 독립운동가 최양옥도 주막에서 만나 그를 적극 돕기로 하면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횡성4.1만세운동을 준비할 때부터 거사일까지 적극 가담했다가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52년 12월 19일 여사가 숨을 거두자 마을사람들은 갑천면 구방2리 공동묘지에 여사를 안장했으나 1990년 횡성군에서 한치 저수지 인근, 당시 김여사가 운영하던 주막 근처에 새로 안장하면서부터 선양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1972년 춘천교대 조동걸 교수에 의해 김여사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2013년 4월 '강원을 빛낸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독립선언문
독립선언문
태극의 울림

독립선언문을 거머쥔 손과 태극기 물결의 이어짐으로 횡성군민의 기개를 널리 떨치고 애국의 고장 횡성의 가치를 드높인 4.1횡성군민 만세운동의 함성 표현
그 날의 함성을 잊지 않겠습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15분의 독립지사들의 공적판이 개별적으로 건립되어 있다.
최종하 | (1877~1922) 대통령 표창, 횡성 출생

일찍이 천도교에 몸담아 1919년 3월 27일 횡성읍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거사 직전 천도교 횡성읍 대교구장 신분으로 서울에 가서 손병희를 만나 독립선언서 10매를 가지고 돌아와 김인경 등 4명과 함께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동지들과 함께 60여 매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해 거사일은 3월 27일 장터에 모인 300여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강달회 | (1868~1919) 건국훈장 애족장, 원주 소초면 둔둔리 출생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 출신으로 횡성천도교를 다녔으며, 당시 51세의 나이로 횡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피살되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심의성의 회고담에 따르면 3월 20일경 의병 강도영의 아들인 천도교인 강만형이 이웃에 사는 강달희, 하영현과 횡성 천도교대교구장 최종하와 상의하여 천도교 이동구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횡성읍에서 시위하고 원주 서초면에서 그 다음날 만세시위를 할 것을 계획하였다.
탁영재 | (1866~1941) 건국훈장 애족장, 횡성 출생

1919년 3월 27일 횡성장날에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항일 비밀결사 철원애국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철원애국단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ㄷ고립애국단의 강원도단의 속칭으로, 대한독립애국단의 활동은 강원도에서 가장 활발했고, 철원이 강원도단의 중심지여서 철원애국단이라 불렀다. 철원애국단에서는 통합 임시정부의 수립을축하하는 만세시위를 독자적으로 추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철원애국단은 1920년 발각돼 조직이 와해됐으나 탁영재는 이 일로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