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권동진 동상(삼일공원)

유형
동상·부조 | 안내판·표지석 |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비석
주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관련인물
관련사건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충청북도 괴산군 출신으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고, 법명은 실암(實菴)이다. 원래 집안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아버지 대 괴산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태어났고, 1869년 무렵 서울 재동으로 이사해 성장하였다.19세가 되던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주1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희연 등과 초관(哨官)주2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서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5년 무렵 1년간 경상남도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주3을 지내고,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나갔다. 1895년 소위 대원군의 ‘ 명성황후 폐위’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면서 그 해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 망명한 후 일본 도쿄〔東京〕의 근위사단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하면서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전 훈련을 받았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 사무를 익혔다. 그런데 오사카〔大阪〕에서 동학 교주로서 망명 중인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하고 귀국하는 길에 오세창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손병희가 천도교 대도주(大道主)주4에 취임해 조직을 정비할 때 그를 보좌하며 천도교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교육 진흥과 식상 흥업을 앞세운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한협회에서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재편의 움직임이 보이자 손병희, 오세창, 최린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를 모색한 끝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정치노선과 종교노선에 따라 거듭되는 분화를 겪었다. 이때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서 자치운동을 도모하는 천도교 신파와 달리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천도교 구파가 1926년부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6 · 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협동전선체로서 탄생한 신간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1929년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사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였다.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탐방로그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에 위치한 삼일공원을 찾았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충북 출신 독립유공자 손병희 선생, 신흥식 선생, 권동진 선생, 권병덕 선생, 신석구 선생 등 5인의 숭고한 독립운동 심신의 뜻을 기리고, 시민들의 애국애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1980년 8월 충청북도에서 5인의 동상을 건립하여 상징적 기념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인물정보

성명
권동진
한자명
權東鎭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1 ~ 1947
본적
서울 서울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한말(韓末)에 함안군수(咸安郡守),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활동(活動)하고 임오군란 시(壬午軍亂時)에는 일본(日本)으로 망명(亡命)함. 2.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33인(三十三人) 중 일인(一人)으로 삼년(三年) 징역형(懲役刑)을 받았고. 1947년 3월 9일 병(病)으로 별세(別世)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