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305
- 탐방로그
-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에 있는 고드미마을 단재 선생의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매주 월요일, 신정, 설날, 추석이 휴관일이라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신채호(申采浩)가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문헌.
이 책은 1931년 당시 조선일보사장인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에 의하여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신채호는 1910년 우리나라를 탈출한 뒤 상해(上海), 북경(北京),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2회 이상 고구려·발해의 유적을 답사한 바 있는데, 특히 1914년에는 대종교(敎) 제3대 종사(宗師)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西間島) 환인현(桓仁縣)에 가서 1년간 체류하며 고적답사,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의 국사교수 및 「조선사 朝鮮史」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때 집필한 「조선사」는 동창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로 개제(改題)되었거나, 그 내용이 흡수된 것으로 추정이 될만큼 이 책에는 대종교적인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은 신채호의 역사연구단계로 볼 때 「독사신론 讀史新論」에서 조선상고사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작품으로 그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사신론」에서는 단군, 부여, 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둘째 대종교적 분위기에 젖어든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고적답사를 통한 현장확인, 문헌수집, 유물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의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평이한 국한문(國漢文)문체의 역사서술을 느낄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적(自尊的)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한 것은 대종교의 포교와 관련이 깊겠지만, 그밖에 우리의 상고 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다.
신채호(申采浩)가 1910년대 후반에 저술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상고사에 관한 문헌.
이 책은 1931년 당시 조선일보사장인 안재홍(安在鴻)의 주선에 의하여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신채호는 1910년 우리나라를 탈출한 뒤 상해(上海), 북경(北京), 만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2회 이상 고구려·발해의 유적을 답사한 바 있는데, 특히 1914년에는 대종교(敎) 제3대 종사(宗師) 윤세복(尹世復)의 초청으로 서간도(西間島) 환인현(桓仁縣)에 가서 1년간 체류하며 고적답사,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의 국사교수 및 「조선사 朝鮮史」 집필에 몰두하였다. 이때 집필한 「조선사」는 동창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뒷날 「조선상고문화사」로 개제(改題)되었거나, 그 내용이 흡수된 것으로 추정이 될만큼 이 책에는 대종교적인 분위기가 짙게 나타나고 있다.
이 문헌은 신채호의 역사연구단계로 볼 때 「독사신론 讀史新論」에서 조선상고사로 이행하는 중간단계의 작품으로 그 내용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사신론」에서는 단군, 부여, 고구려로 계승되는 역사인식체계와 그 역사무대로서 만주를 중요시하였지만, 이 책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 부여족의 식민지로서 중국대륙의 일부까지를 우리의 역사로 수용하고 있다.
둘째 대종교적 분위기에 젖어든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고적답사를 통한 현장확인, 문헌수집, 유물발굴 및 실증적 방법의 적용 등의 노력을 엿볼 수 있으며 평이한 국한문(國漢文)문체의 역사서술을 느낄 수 있다.
셋째 한국의 상고문화에 대한 국수주의적이고 자존적(自尊的)인 인식이 뚜렷하다. 단군왕조를 강조한 것은 대종교의 포교와 관련이 깊겠지만, 그밖에 우리의 상고 문화가 중국을 능가하는 우수한 문화임을 강조하는 여러 사례들이 기술되어 있다.
단재 선생과 관련있는 인물
경부 신백우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벽초 홍명희 선생
경부 신백우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벽초 홍명희 선생
예관 신규식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 우근 유자명 선생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신채호(申采浩)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처음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전 12편으로 그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 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호는 그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 기자, 삼한, 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 3조선,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무대를 중국동북쪽지역과 랴오시(遼西)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지역을 경영하였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였으나, 신라에 대해서는 중요시 하지 않았다.
신채호(申采浩)가 우리나라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
단군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 서술하고 있다. 1931년에 처음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되었고, 1948년 종로서원에서 단행본으로 발행되었다.
원래 이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일부분이었으나, 그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상고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전 12편으로 그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분립시대, 4편 열국쟁웅시대(列國爭雄時代) 대(對) 한족 격전시대, 5편 (1) 고구려전성시대, (2) 고구려의 중쇠(中)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 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제국 대 고구려 공수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제1편 총론에서 신채호는 그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첫째, 종래의 한국사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종래의 단군, 기자, 위만, 삼국으로 계승된다는 인식체계와 단군, 기자, 삼한, 삼국의 인식체계를 거부하고 신채호는 실학시대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에서 영향을 받은 듯, 대단군조선, 3조선, 부여,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체계를 수립하였다.
둘째, 이러한 역사체계에 부수되는 것으로 상고시대 한국사의 웅혼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는데, 상고사의 역사무대를 중국동북쪽지역과 랴오시(遼西)지역에까지 넓혔고, 단군시대에 산둥(山東)지역을 경영하였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었다. 셋째, 삼국 중 고구려와 백제는 중시하였으나, 신라에 대해서는 중요시 하지 않았다.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先草
신채호(申采浩)가 쓴 6편의 논문을 묶은 책,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 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고대사에 관련된 것으로 그 제목은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 古史上史請文名詞解釋法〉·〈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 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삼국지동이열전교정 三國志東夷列傳校正〉·〈평양패수고 平壤浿水考〉·〈전후삼한고 前後三韓考〉·〈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등이다.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은 한자의 음(音)과 뜻(義)을 빌려 만든 이두문의 고사(古史)상의 명사표기를 신채호가 제대로 136 해석하기 위하여 시도한 글이다.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은 《삼국사기》안에 동서(東西)의 두 글자가 서로 바꾸어진 실제와 그 원인 등을 밝힌 글이다. 또한 〈삼국지동이전교정〉과 〈평양패수고〉는 그의 고증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논문들이다.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장 야심적이며 그 학술적 영향도 큰 논문은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다. 〈전후삼한고>는 단군이 세운 조선이 뒷날 삼조선 즉 삼한으로 분립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주지역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이들을 전삼한이라 칭하였고, 이들 전삼한이 이동하여 한반도 남쪽의 후삼한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보통 삼한으로 인식한 다는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앞에서 다른 논문들이 고대사를 다룬 것임에 비해서, 이것은 고려 중기의 이른바 묘청(妙淸)의 난을 다룬 것이다. 하 그는 조선 근세에 이르러 종교나 학술, 정치, 풍속이 모두 사대주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노예성을 산출한 사건이 '한마디로 회답하여 고려 인종 13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신채호(申采浩)가 쓴 6편의 논문을 묶은 책,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을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 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고대사에 관련된 것으로 그 제목은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 古史上史請文名詞解釋法〉·〈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 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삼국지동이열전교정 三國志東夷列傳校正〉·〈평양패수고 平壤浿水考〉·〈전후삼한고 前後三韓考〉·〈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 朝鮮歷史上一千年來第一大事件〉 등이다.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은 한자의 음(音)과 뜻(義)을 빌려 만든 이두문의 고사(古史)상의 명사표기를 신채호가 제대로 136 해석하기 위하여 시도한 글이다.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은 《삼국사기》안에 동서(東西)의 두 글자가 서로 바꾸어진 실제와 그 원인 등을 밝힌 글이다. 또한 〈삼국지동이전교정〉과 〈평양패수고〉는 그의 고증적인 자세를 잘 보여주는 논문들이다.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장 야심적이며 그 학술적 영향도 큰 논문은 〈전후삼한고〉와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이다. 〈전후삼한고>는 단군이 세운 조선이 뒷날 삼조선 즉 삼한으로 분립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만주지역에 걸쳐 존재하였는데 이들을 전삼한이라 칭하였고, 이들 전삼한이 이동하여 한반도 남쪽의 후삼한을 형성하였는데 이를 보통 삼한으로 인식한 다는 것이다.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은 앞에서 다른 논문들이 고대사를 다룬 것임에 비해서, 이것은 고려 중기의 이른바 묘청(妙淸)의 난을 다룬 것이다. 하 그는 조선 근세에 이르러 종교나 학술, 정치, 풍속이 모두 사대주의 노예가 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렇게 노예성을 산출한 사건이 '한마디로 회답하여 고려 인종 13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正氣門(정기문)
단재 신채호 사당 및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
이 영당은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의 뒤편에 묘소가 있다.
본래는 1960년에 신씨 문중에서 낭성면 관정리에 세웠던 것이나, 1978년에 청원군에서 이곳에 새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선생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자 옛 집터인 이곳에 단장하였다. 묘비는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이 만든 것을 신백우(申伯雨)가 세웠으며,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신채호 선생은 한말의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요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단재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26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등에 민족의식을 높이는 논설을 쓰면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 1928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복역 중 순국하였다. 〈조선상고사〉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
소재지: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
이 영당은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사당의 뒤편에 묘소가 있다.
본래는 1960년에 신씨 문중에서 낭성면 관정리에 세웠던 것이나, 1978년에 청원군에서 이곳에 새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하였다.
선생이 1936년 2월 21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자 옛 집터인 이곳에 단장하였다. 묘비는 한용운(韓龍雲), 오세창(吳世昌)이 만든 것을 신백우(申伯雨)가 세웠으며, 1972년에 세운 사적비가 있다.
신채호 선생은 한말의 민족주의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요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단재이며 본관은 고령이다. 26세에 성균관 박사를 지냈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등에 민족의식을 높이는 논설을 쓰면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다 1928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복역 중 순국하였다. 〈조선상고사〉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기는 단재 신채호(1880~1936)선생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곳입니다. 선생은 이곳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셨으며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균관박사를 지내셨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강직한 논설을 쓴 언론인으로 조선상고사등 많은 사서를 저술한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다. 1929 빌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1936년 2월 21일 57세로 순국하셨다.
正氣門(정기문)
丹齋影閣(단재영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에 있는 고드미마을 단재 선생의 사당 및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이다.
丹齋 記念館(단재 기념관)
天鼓頌(천고송)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오지고천고자 기능애이노의)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애성비노성장 환이천만인기)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내의연결사심 광조종복강토)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취진이도혈래 기흔어아천고)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하늘북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박정규 번역, 송해석 서
吾知鼓天鼓者 其能哀而怒矣(오지고천고자 기능애이노의)
哀聲悲怒聲壯 喚二千萬人起(애성비노성장 환이천만인기)
乃毅然決死心 光祖宗復疆土(내의연결사심 광조종복강토)
取盡夷島血來 其흔於我天鼓(취진이도혈래 기흔어아천고)
丹齋 申采浩(단재 신채호)
하늘북
나는 아네 하늘북 치는 사람을
그는 슬퍼하기도 성내기도 하네
슬픈 소리 서럽고 노한 소리 장엄하여
이천만 동포를 불러일으키나니
의연히 나라 위해 죽음을 결심케 하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나니
섬 오랑캐의 피를 싸그리 긁어 모아
우리 하늘북에 그 피를 칠하리라
박정규 번역, 송해석 서
단재 신채호 연보
1880년 12월 8일 (음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申光植)과 밀양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86년(7세) 부친 신광식(1849년생)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887년(8세)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 고드미
1888년(9세)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한시를 지음.
1893년(14세) 사서삼경(四書三經) 독파
1895년(16세) 전통적 풍속에 따라 향리에서 풍양조씨(豊壤趙氏)와 결혼
1896년(17세)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 한학자 신승구(申昇求)에게 수학
1897년(18세) 천원군 목천(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한학자 신기선(申箕善)에게 수학
1898년(19세) 성균관에 입교
1901년(22세) 향리 부근 가덕면 인차리 문동학원(東學院) 강사로 있으면서 신규식(申圭植)과 애국계몽운동 전개
1904년(25세) 향리 부근 낭성면 묵정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산동학원(山東學院) 설립
1905년(26세) 합시(合試)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 박사가 됨.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기자로 활동
1880년 12월 8일 (음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에서 가난한 선비 신광식(申光植)과 밀양박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886년(7세) 부친 신광식(1849년생)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1887년(8세)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로 이사 고드미
1888년(9세) 통감(通鑑)을 해독하고 한시를 지음.
1893년(14세) 사서삼경(四書三經) 독파
1895년(16세) 전통적 풍속에 따라 향리에서 풍양조씨(豊壤趙氏)와 결혼
1896년(17세) 청원군 가덕면 청룡리 한학자 신승구(申昇求)에게 수학
1897년(18세) 천원군 목천(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한학자 신기선(申箕善)에게 수학
1898년(19세) 성균관에 입교
1901년(22세) 향리 부근 가덕면 인차리 문동학원(東學院) 강사로 있으면서 신규식(申圭植)과 애국계몽운동 전개
1904년(25세) 향리 부근 낭성면 묵정리에 신규식, 신백우와 함께 산동학원(山東學院) 설립
1905년(26세) 합시(合試)에 입격(入格)하여 성균관 박사가 됨.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기자로 활동
1907~
1907년(28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발행,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조직 차명
1908년(29세)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독사신론(讀史新論) 등 발표
1909년(30세)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발표, 신민회의 청년학우 발기
1910년(31세) 소년잡지에 국사사론(國史私論) 발표.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
1911년(32세) 권업신문〈勸業新聞〉주필
1912년(33세) 항일비밀결사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
1913년(34세)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움
1914년(35세) 조선사(朝鮮史)집필, 백두산, 광개토대왕릉을 현지 답사
1915년(36세) 북경에서 도서관 생활
1916년(37세) 꿈하늘(夢天)을 탈고
1917년(38세) 진남포를 거쳐 서울에 잠입 후 요절한 김기수(金簊壽)의 죽음을 조상 후 다시 북경으로 망명
1918년(39세)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머물며 조선사 집필
1919년(40세)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大國獨立直畵書)에 민족대표 39명의 사람으로 서명에 참가. 상해임시정부수립에 참가
1920~
1920년(41세) 북경에서 보합단(普合團)에 참여, 박자혜(朴慈惠)와 결혼
1921년(42세) 북경에서 천고(天鼓) 창간
1922년(43세) 고대사 연구 및 집필에 진력
1923년(44세) 「조선혁명선언」 발표. 북경 석등암에 기거하면서 고대사 연구와 집필
1925년(46세) 사론(史論) 집필에 몰두
1927년(48세)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여
1928년(49세) 「용과용의 대격전」 소설 창작. 북경, 천진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 참가. 대만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償遺事件)으로 대련 감옥에 투옥
1929년(50세) 대련지방법원에서 제2회 공판
1930년(51세) 10년형 복역이 확정, 여순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411번). 홍명희 주선으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 발간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사(朝鮮史, 1948년 단행본으로 출간때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개명」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발표
1935년(56세) 건강악화로 병보석 출감을 통보하였으나 거절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감옥에 뇌일혈로 쓰러짐.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순국. 2월 24일 여순에서 화장 후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고두미에 모심
1907년(28세)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발행,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조직 차명
1908년(29세) 국한문판 을지문덕(乙支文德), 독사신론(讀史新論) 등 발표
1909년(30세)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발표, 신민회의 청년학우 발기
1910년(31세) 소년잡지에 국사사론(國史私論) 발표.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망명
1911년(32세) 권업신문〈勸業新聞〉주필
1912년(33세) 항일비밀결사단체인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동
1913년(34세) 박은식, 문일평, 정인보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움
1914년(35세) 조선사(朝鮮史)집필, 백두산, 광개토대왕릉을 현지 답사
1915년(36세) 북경에서 도서관 생활
1916년(37세) 꿈하늘(夢天)을 탈고
1917년(38세) 진남포를 거쳐 서울에 잠입 후 요절한 김기수(金簊壽)의 죽음을 조상 후 다시 북경으로 망명
1918년(39세)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머물며 조선사 집필
1919년(40세) 만주 길림성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大國獨立直畵書)에 민족대표 39명의 사람으로 서명에 참가. 상해임시정부수립에 참가
1920~
1920년(41세) 북경에서 보합단(普合團)에 참여, 박자혜(朴慈惠)와 결혼
1921년(42세) 북경에서 천고(天鼓) 창간
1922년(43세) 고대사 연구 및 집필에 진력
1923년(44세) 「조선혁명선언」 발표. 북경 석등암에 기거하면서 고대사 연구와 집필
1925년(46세) 사론(史論) 집필에 몰두
1927년(48세) 신간회(新幹會) 발기에 참여
1928년(49세) 「용과용의 대격전」 소설 창작. 북경, 천진에서 개최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 참가. 대만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償遺事件)으로 대련 감옥에 투옥
1929년(50세) 대련지방법원에서 제2회 공판
1930년(51세) 10년형 복역이 확정, 여순감옥으로 이감(죄수번호 411번). 홍명희 주선으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 발간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사(朝鮮史, 1948년 단행본으로 출간때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로 개명」와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발표
1935년(56세) 건강악화로 병보석 출감을 통보하였으나 거절
1936년(57세) 2월 18일 여순감옥에 뇌일혈로 쓰러짐. 2월 21일(음력 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순국. 2월 24일 여순에서 화장 후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고두미에 모심
단재 신채호 선생의 주요 저서
[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 사론(史論) ]
⦁조선자치제의 약사(朝鮮自治制의 略史)
⦁조선사 정리에 대한 사의(朝鮮史 整理에 對한 私疑)
⦁조선민족의 전성시대(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연개소문의 사년(淵蓋蘇文의 死年)
⦁조선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朝鮮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뉘 것이냐
[ 전기(傳記) ]
⦁이태리건국삼걸전(伊利建國三傑傳)
⦁을지문덕(乙支文德)
⦁이순신전(李舜臣傳)
[ 영인(影印) ]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 평론·선언·논설(評論·宣言·論說) ]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선언문(宣言文)
⦁일본의 3대충노(日本의 三大忠奴)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국문의 기원(文의 起源
⦁한국과 만주(韓國과 滿洲)
⦁천고(天鼓)
[ 소설(小說) ]
⦁꿈하늘
⦁유화전(柳花傳)
⦁백세노승의 미인담(百歲老僧의 美人談)
⦁용과 용의 대격전(龍과 龍의 大激勵)
[ 수상(隨想) ]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차라리 怪物을 取하리라)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음
⦁피의 인과(因果)
[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독사신론(讀史新論)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 사론(史論) ]
⦁조선자치제의 약사(朝鮮自治制의 略史)
⦁조선사 정리에 대한 사의(朝鮮史 整理에 對한 私疑)
⦁조선민족의 전성시대(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연개소문의 사년(淵蓋蘇文의 死年)
⦁조선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朝鮮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
⦁만리장성(萬里長城)은 뉘 것이냐
[ 전기(傳記) ]
⦁이태리건국삼걸전(伊利建國三傑傳)
⦁을지문덕(乙支文德)
⦁이순신전(李舜臣傳)
[ 영인(影印) ]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 평론·선언·논설(評論·宣言·論說) ]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선언문(宣言文)
⦁일본의 3대충노(日本의 三大忠奴)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 (歷史와 愛國心의 關係)
⦁국문의 기원(文의 起源
⦁한국과 만주(韓國과 滿洲)
⦁천고(天鼓)
[ 소설(小說) ]
⦁꿈하늘
⦁유화전(柳花傳)
⦁백세노승의 미인담(百歲老僧의 美人談)
⦁용과 용의 대격전(龍과 龍의 大激勵)
[ 수상(隨想) ]
⦁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차라리 怪物을 取하리라)
⦁지기(知己)를 위하여 죽음
⦁피의 인과(因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학
1910년 해외로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그의 역사연구의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그의 역사학은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며,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한국사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바 그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으며,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하였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밖에 존재하였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였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 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1910년 해외로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그의 역사연구의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그의 역사학은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며,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한국사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바 그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으며,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하였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밖에 존재하였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였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 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독사신론(讀史新論)
1968년 신채호(申采浩)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 이 논문은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뒤에 신채호는 "16년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소년」 1910년 8월 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다.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그 완결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은 ① 단군시대 ② 부여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
1968년 신채호(申采浩)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 이 논문은 「대한매일신보」에 1908년 8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연재되었다. 뒤에 신채호는 "16년전에 국치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을 열독(閱讀)하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을 지었다."고 술회하였다.
1910년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고자 만주로 망명한 뒤, 최남선(崔南善)이 경영하는 잡지「소년」 1910년 8월 호에 「국사사론」이라는 제목으로 전재되었다. 이 논문은 1908년 전후의 신채호의 역사인식을 포괄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데 미완성의 논문으로서 그 완결편이 「조선상고사」와 「조선상고문화사」이다.
체재는 서론과 상세(上世)로 나뉘며, 서론에서 인종과 지리를 논하면서 그의 사관을 피력하였으며, 상세에서는 단군에서부터 발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내용은 ① 단군시대 ② 부여왕조와 기자(箕子)·부론(附論) ③ 부여족 대발달시대 ④ 동명성왕의 공덕 ⑤ 신라 ⑥ 신라·백제와 일본의 관계 ⑦ 선비족·지나족과 고구려 ⑧ 삼국흥망의 이철(異轍) ⑨ 김춘추(金春秋)의 공죄 ⑩ 발해의 존망 순서로 논술하였다.
저자는 먼저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며, 영토의 득실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국가주의·민족주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