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3·1운동 기념관
사적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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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기념관은 3.1운동 당시 가장 극렬하게 만세항쟁을 펼쳤던 4.1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집결지였던 만세고개 일원에 건립된 기념관이다. 안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전국3대 실력 항쟁이라고 불릴만큼 거셌는데 당시 자료를 포함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물, 기록 등을 실물 모형 및 체험의 형태로 관람할 수 있다. 1989년 사료전시실을 건립한 것이 본 기념관의 전신으로 이후 2001년 무궁화동산을 준공하면서 광복사와 기념관을 개관했으며 2003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크게 로비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있다.
안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월부터 4월 3일까지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이다.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원주민들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안성군 지역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안성군 독립운동가인 최은식, 이유석 등이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전래되어서 양성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와 사무소에 내걸렸던 일장기를 끌어내어서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 등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2일간의 해방기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원과 안성 4개지역에 검거반을 파견하였고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청년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0년 안성보통학교에서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청년운동,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가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 김태원(죽산면 장계리 출신)과 유만수(금광면 개산리 출신) 등은 의열단, 대한애국청년당 등에 관여하였다. 또 1940년 광복군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안성지역 출신인 심광식(미양면 강덕리), 홍종윤(미양면 용두리), 박건배(고삼면 봉산리) 등이 있다.
안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월부터 4월 3일까지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이다.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원주민들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안성군 지역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안성군 독립운동가인 최은식, 이유석 등이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전래되어서 양성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와 사무소에 내걸렸던 일장기를 끌어내어서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 등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2일간의 해방기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원과 안성 4개지역에 검거반을 파견하였고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청년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0년 안성보통학교에서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청년운동,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가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 김태원(죽산면 장계리 출신)과 유만수(금광면 개산리 출신) 등은 의열단, 대한애국청년당 등에 관여하였다. 또 1940년 광복군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안성지역 출신인 심광식(미양면 강덕리), 홍종윤(미양면 용두리), 박건배(고삼면 봉산리) 등이 있다.
탐방로그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과 추석 당일은 휴관이며 관람시간은 09시부터 18시까지이다(17시 입장마감) 관람료는 무료이다. 기념관 전시와 연계된 교육프로그램인 '기념관 한바퀴'는 동절기(1~2월) 중에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물정보
- 성명
- 김태원
- 한자명
- 金泰源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생몰년도
- 1896 ~ 1975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 1919년 상해로 망명 임정 충청도 특파원에 피명(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203)되어 귀국(歸國), 독립사상의 선전, 선동 혈복단(血復團) 등에서 활약. 2. 1920년 군자금 모집 암살단에 가담하여 항일투쟁(항일순국의열사전 72) (독운사 p.92) 3. 동지를 규합, 연통제를 조직 또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 단장에 피명. 대한독립단을 조직 단장에 피명. 혈복단을 조직 단장에 피명. 4. 상해 임정 ‘독립신문’을 살입살포, 독립신문을 인쇄 살포, 혈복단 경고문, 독립창가(唱歌), 독립신문을 경기(京畿), 충청(忠淸) 등지에 배부(동아일보 1921.6.26, 10.29) 5. 1921년 혈복단 및 암살단 사건으로 3년형 어도받음(동아일보 1921.11.16) 6. 1942년 예비검속으로 3개월간 투옥.
김태원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남진우
- 한자명
- 南進祐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99 ~ 1933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포상년도
- 2005
공적개요
1919. 3월 경기도京畿道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 90도를 받음.
남진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박건배
- 한자명
- 朴健培
- 운동계열
- 광복군
- 생몰년도
- 1910 ~ 1973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포상년도
- 1963
공적개요
1945. 5월 광복군(光復軍) 제 3지대에 입대한 사실이 확인됨.
박건배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심광식
- 한자명
- 沈光植
- 운동계열
- 광복군
- 생몰년도
- 1911 ~ 1960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1
공적개요
1936년 2월 중국(中國) 육군군관학교(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를 수료하고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중앙당(中央黨) 군사부원(軍事部員)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2.10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議員)(한국독립당계(韓國獨立黨系))으로 피선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내무부(內務部) 경위대(警衛隊)에서 1945년 6월에는 광복군(光復軍) 총사령부(總司令部) 서무과장(庶務課長)으로 1945.8월 광복을 맞이 할 때까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심광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안재헌
- 한자명
- 安在憲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900 ~ 1977
- 본적
- 충청북도 음성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19. 안성(安城) 죽산공보 4년(竹山公普四年) 반장(班長)으로써 3.1만세시위시에 전교학생들로 하여금 시위에 참가하도록 주동하고 그 선두에서 주도하다가 피체되여 1년6월형을 받고 복역 (판결등본) 출옥 후 영농생활(營農生活)을 하면서 왜정(倭政)에 비협조함으로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감시를 당하였음
안재헌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유만수
- 한자명
- 柳萬秀
- 운동계열
- 의열투쟁
- 생몰년도
- 1921 ~ 1975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45년 7월 친일파 박춘금(朴春琴)이 주최하는 일본, 중국, 만주대표 외에 조선총독 등 요인이 참석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 회장(會場)인 부민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대회장(大會場)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등 독립운동의 도미(掉尾)를 장식하였음
유만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이유석
- 한자명
- 李裕奭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86 ~ 1950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국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3.1 운동의 안성군(安城郡) 책임자로서 주동자색출 시 피신하여 구금은 면하였으나 왜경이 보복으로 가옥, 가재 등을 전소 당하였으며 18년간에 걸친 청소년교육에 이바지한 사실이 확인됨.
이유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진공필
- 한자명
- 陳公弼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79 ~ 1942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대통령표창
- 포상년도
- 2011
공적개요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읍내면(邑內面) 장기리(場基里)에서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고 시위행진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진공필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최은식
- 한자명
- 崔殷植
- 운동계열
- 3.1운동
- 생몰년도
- 1899 ~ 1960
- 본적
- 충청남도 천안
- 포상훈격
- 독립장
- 포상년도
- 1963
공적개요
1919년 음(陰) 3월 1일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에서 수천 군중이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며 선언식을 행한 후에 원곡면사무소(元谷面事務所)를 소훼(燒毁)하고 다시 양성면(陽城面)으로 가서 그 면민(面民)들과 합세하여 면소(面所) 주재소 우편소의 건물은 후일 새정부에서 사용할 것이라 하여 그대로 보존하고 문서와 기구만을 소기(燒棄)하고 또한 일본인 대금업자 융수지(隆須知)의 상점을 파괴하고 해방하는데 홍찬섭(洪燦燮)과 더부러 주동역할을 하다(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P171-172) 그 후 피체(被逮)되여 주모자(主謀者)로서 8년 복역(服役)을 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아마 피체(被逮)된 인원은 수백명을 넘었으며 고문치사(拷問致死)한 이가 7명이고 복역(服役)된 이는 126명이었다.(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P171-172)
최은식의 발자취
인물정보
- 성명
- 홍종윤
- 한자명
- 洪鍾允
- 운동계열
- 광복군
- 생몰년도
- 1917 ~ 1992
- 본적
- 경기도 안성
- 포상훈격
- 애족장
- 포상년도
- 1990
공적개요
1944년 3월 15일 광복군(光復軍)에 입대(入隊) 8.15까지 항일 투쟁(抗日鬪爭)에 활동(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홍종윤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