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3·1운동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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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세로 868
탐방로그
매주 월요일, 1월1일, 설날과 추석 당일은 휴관이며 관람시간은 09시부터 18시까지이다(17시 입장마감) 관람료는 무료이다. 기념관 전시와 연계된 교육프로그램인 '기념관 한바퀴'는 동절기(1~2월) 중에는 운영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복사(光復祠)
이 사당은 1919년 3.1운동 당시 안성지역에서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순국신열 25분과 온갖 고초를 겪으신 애국지사 205분의 위패를 봉안한 곳입니다. 우리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 고개 숙여 명복을 빌고 불굴의 독립정신과 겨레를 위한 희생정신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순국선열 25인과 애국지사 205인의 위패를 봉안한 光復祠(광복사)
광복사 뒤쪽으로 보이는 원곡 양성 3.1독립항쟁기념탑
원곡-양성 3.1 독립항쟁 기념탑
원곡-양성 3.1 독립항쟁 기념탑
3.1운동 원곡-양성 독립항쟁기념탑 명 병서(三.一運動 元谷-陽城 獨立抗爭紀念塔 銘 幷序)
민중(民衆)은 풀과 같아 삭풍에 쓰러지고 시들기 쉬우나 그 생명은 끊이지 않으니 때가 되면 다시 피어나 천지를 녹색으로 뒤덮는다. 뭇 짐승이 뜯고 밟고 할퀴어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나니 민족의 역사도 이 같이 영구히 빛난다. 아아! 己未年(기미년, 1919년) 요원의 불길은 민족(民族)의 정기(精氣)를 만방에 떨쳤다.
간악한 왜적(倭敵)이 庚戌年(경술년, 1910년 8월) 우리 국권(國權)을 병합(倂合)하기 전부터 겨레는 의병(義兵) 항쟁 등의 국권회복운동을 이어왔고, 마침내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으로 삼천리를 진동시켰다.
안성(安城)의 원곡(元谷)과 양성(陽城) 면민들은 4월 1일(陰 3월 1일) 이덕순, 이유석, 이근수, 최은식, 이희용 지사(志士) 등의 주도와 주민의 자발적 참여로 왜적(倭賊)을 소탕하였다. 그날 밤 양성으로 진격하던 1천여 원곡 면민들은 이 성은고개(만세고개)에서 왜적 축출을 맹세하였다.
노도(怒濤)같이 달려간 원곡주민들은 양성주민들과 합세하여 2천여 대군을 형성, 태극기와 횃불아래 만세(萬歲)를 부르면서 전화선을 절단,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쳐부수며 불태웠고 왜적들은 발포(發砲)하며 저항하다 도망쳤다. 시위대는 원곡으로 돌아가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고자 평택(平澤)으로 진출 도중 헌병대 추격 소식에 남산(南山)으로 입산, 항쟁 준비 후 해산하였다.
이후 서부 안성일대는 이틀간 해방지역이 되었으나 왜적의 만행으로 순국 24위, 옥고 127인, 민가 소실 9동, 배상 1만1천 여원, 취학방해 등 엄청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원곡(元谷).양성(陽城)의 항쟁은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 옥상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재판에 증빙된 3.1운동 3대 실력항쟁 중에서도 대표적인 의거였다. 참으로 거룩한 승리였다. 이에 명(銘)을 지어 천추만대(千秋萬代)에 전한다.

4월 초하루 밤 성은고개의 함성이여 지사(志士)의 사자후(獅子吼)에 민중은 호응하였네.
원곡 양성의 면민들 노도같이 합세하여 왜적(倭賊)들을 축출하고 소굴을 불태웠네.
거룩하다! 3·1운동에 으뜸이 되니 정의는 영원히 시들지 않아 만세(萬世)에 빛나리!

辛巳年(신사년, 2001년) 6월 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문학박사 이성무 지음
전시관
■ 원곡면 만세시위 운동
원곡면에서는 주민들이 면장을 글어내어 시위대 앞에 세우고 태극기를 들게 하여 양성으로 출발하였다.
■ 양성면 만세시위 운동
양성면에서는 원곡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경찰주재소와 우편소를 부수어 일제의 통신망을 무력화 시켰다.
원곡·양성지역의 3.1운동은 전국 3대 실력항쟁 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4월 1일 양성면과 원곡면 주민 2,000여명은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벌였다.

원곡·양성 3.1운동 기념탑

1919년 3월 11일 이곳 양성보통학교에서 최초의 시위가 벌어졌다. 탑골공원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지 열하루째날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 모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기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2-18 만세고개 안성 3.1운동기념관
만세고개
만세고개
이 고개는 양성고개 또는 성은고개라 했다. 3.1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일 밤 원곡면민 1,000여명이 이 고개에 이르러 이유석, 이덕순, 이근수, 최은식, 이희룡 등의 지도 아래 돌과 몽둥이 등을 갖추고 일제 통치기관을 축출키로 결의한 뒤 양성으로 돌진 그곳 주민과 합세 2,000여 명이 일제를 몰아내고 이 지역을 2일간 해방시켰다. (시위대는 이어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코자 했으나 일본군의 추격정보로 해산했음)
원곡,양성의 독립운동은 평북 의주군, 황해도 수안군과 함께 3.1운동 3대 실력항쟁의 하나이며, 최대의 거사였다는 사실과 이 고개에서의 결의 등은 일제의 재판기록에도 명시되어있다.
이 지역의 3.1의거를 순국 24위, 피검 361명, 옥고 127명, 태형 42명, 민가 소실 9동 외에 배상, 취학 방해 등의 큰 희생을 강요당했으나, 광복 후 1993.8.15 현재 우리 정부로부터 100명이 건국훈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등을 추서받았다. 그 위대한 독립정신과 이곳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3.1의거 이후 이 고개를 만세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마침내 정부고시(건설부 768호:1991.12.10.)로 확정된 것이다.
1993년 11월 30일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이택휘 고증하고 만석 최홍규 쓰다
이 만세 소리 조병화

이곳 만세고개는
그 옛날 일본 식민지 통치에 항거
이 곳 애국 선열들이 불꽃 같이 일어나
뜨거운 피로 조국 자주 독립을 외치던
3·1만세운동, 그 만세소리 언덕

지금도 생생히
그 피끊는 만세소리 들려오나니
오, 이 만세소리
이 겨레, 이 조국에 영원하리라

조국은 겨레의 터전, 겨레의 생존
그 우리의 생존의 보금자리
그 명예, 그 긍지, 그 자존, 그 사랑
우리의 그 몸과 얼이려니
어찌 이 만세소리 잊으리

오, 이 곳을 지나가는 겨레여
잠시 길을 멈추고
이 만세소리 들으소서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지만
이 만세소리 이곳에 영원하리니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만세.
1994.12.12 광복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중앙관심사업 선정
2001.6.29 사당내 위패봉안(순국선열25위, 애국지사196위)

2001.7.18 기념탑 신설공사 준공

2001.10.31 무궁화동산 준공

2001.11.17 안성3.1운동기념관 개관
안성 3·1운동 기념관 종합안내
이 『안성 3·1운동 기념관』은 1919년 3·1독립운동의 민족사적 의의를 드높이고, 자랑스러운 『원곡.양성의 3·1의거』를 비롯한 이 고장의 독립항쟁을 기리며, 그 정신을 받들기 위해 광복 50준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중앙관심사업으로 선정되어 2001년 세운 것입니다.
『원곡·양성의 3·1의거』는 당시 원곡면과 양성면의 약2,000명이 합세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방화 축출하고 이 지역을 이틀간 해방시킬 정도로 격렬하였습니다. 이는 황해도 수안, 평안북도 의지 지방과 함께 맨족대표 33인의 재판에도 증빙된 3·1운동 전국 3대 실력항쟁지로서, 그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힙니다. 그 후 일본군의 만행으로 순국 25인, 옥고 155인, 태형 40인 등 전국 최악의 박해를 겪었지만, 그 우대한 항쟁과 희생은 광복의 원동력으로 민족운동사에 횃불로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