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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3.1운동기념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 비석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산33-6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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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지 9년이 지난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인 33인의 독립선언을 계기로 일본에 항쟁하는 민족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지방으로 파급되어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만세운동의 물결은 태인에도 퍼져, 1919년 3월 5일 10시경 송수연, 김현곤,송한용 세 사람이 태흥이 오리부락 고목 아래서 밀회하여 거사 방법을 토의하였으며 7월부터 읍원정에 근거를 두고 거사준비를 모의하였는데 이때부터 송문상, 김달곤이 함께 참가하였다. 두 사람은 당시 서울 오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신분이요 부유한 가정출신이었다. 거사게획은 3월 16일 태인 장날 헌병 분견소의 정오 타종을 신호로 궐기할것, 김현곤은 독립선언서 인쇄와 태인보통학교의 교원과 학생을 동원할것, 송수연은 행사진행을 지휘할것, 송한용은 태극기를 만들 것으로 모둔 준비가 추진되어 3월 16일(음력 2월 15일) 정오에 종소리가 울리자 시장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였고 송수연의 선봉으로 의혈 청년들이 조국광복을 부르짖는 가두연설을 하고 한편에서는 대오를 지이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헌병들은 총침으로 이를 탄압하니 박지선이 타박상을 입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되었으며 성황산과 항가산에 모여서 시위를 벌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헌병이 추격하여 오면 항가산에서 성황산으로 또는 성황산에서 항가산으로 옮겨가며 밤이 깊도록 독립만세의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이때 권사옥은 김승권으로 부터 공급받은 태극기로 3월 16일 출생지인 옹동면 신성리(속칭 베르매) 뒷산에서 마을 사람들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의 주모자로 100여명이 헌병에 붙잡혀 갔으나 좌절하지 않고 며칠동산 이웃마을에서 계속 되었다. 정읍 검사국으로 송치된 주모자는 송수연, 김현곤,김달곤,송문상등 25명으로 5월 15일 정읍재판소 1심에서 태형 구류 등의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이 탑은 태인 성황산 남쪽 고지에 1919년 3.1운동때 태인지방의 봉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민들의 출연과 군비보조로 1984년 3월 1일 현위치에 건립하였으며 2003년 12월 10일 노후된 탑 복원과 함께 25위에 대한 위패 봉안소를 건립하였다.

탐방로그

매년 3.1절 기념행사 및 참배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인물정보

성명
김달곤
한자명
金達坤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73 ~ 1922
본적
경상북도 성주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07년 4월부터 6월까지 경북(慶北) 성주(星州)에서 십여차례에 걸쳐 약 30냥의 국채보상금(國債報償金)을 낸 사실이 확인됨.

김달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용안
한자명
金龍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26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19년 3월 전북(全北)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에서 송수연(宋洙淵)의 권유에 따라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사용할 태극기(太極旗)를 운반하고, 같은 달 16일 태인시장(泰仁市場)에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하며 활동하다 체포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음.

김용안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진호
한자명
金辰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20
본적
전라북도 고창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7

공적개요

1919년 3월경 전북(全北) 고창군(高敞郡) 무장면(茂長面) 무장리(茂長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음.

김진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현곤
한자명
金玹坤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55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정읍군(井邑郡) 태인시장(泰仁市場)의 만세시위사전계획 및 준비를 위하여 비밀결사 15회(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주도하고 동년(同年) 3.14거사시(擧事時) 선봉에서 활동하다 피포(被捕) 징역 1년 6월형을 수형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군자금모집 활동을 계속한 사실이 확인됨.

김현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지선
한자명
朴址宣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4 ~ 1966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 광무황제(光武皇帝) 국장(國葬)에 참예(參詣)한 후 독립선언서를 소지하고 귀향하여 전북(全北)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에서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제작하는 등 준비를 갖춘 후 3월 16일 태인(泰仁)장날 수천명의 군중을 선도(先導)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지선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근상
한자명
宋根相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52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3월 상순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그 후 체포되어 징역 3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송근상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영근
한자명
宋榮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42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3.16 전북(全北)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에서 김현곤(金炫坤) 송수련(宋洙連) 박지선(朴址宣)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태인(泰仁)장날에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한 후 태극기(太極旗)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수천장을 등사해서 장꾼들에게 나누어주고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송영근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진상
한자명
宋鎭相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62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7

공적개요

1919년 3월 14일 전라북도(全羅北道)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 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송진상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송한용
한자명
宋漢鏞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67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정읍(井邑) 태인(泰仁) 독립운동 만세시위 운동 당시(獨立運動萬歲示威運動當時) 주동 인물(主動人物)로 활약(活躍)하고 징역 10월형(月刑)을 언도(言渡) 받아 복역(服役) 후(後)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와 연락(連絡)을 유지(維持)하면서 군자금(軍資金) 7천원(千円)을 전달(傳達)하는 등 계속적(繼續的)으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한 사실이 확인됨.

송한용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오석흥
한자명
吳錫興
운동계열
만주방면
생몰년도
1880 ~ 1920
본적
미상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20.11.3 만주(滿洲) 연길현(延吉縣)에서 신민단원(新民團員)으로 활동(活動)하다가 일군(日軍)에게 피체되어 연길현(延吉縣) 지인사(志仁社) 동경동(東京洞)에서 총살(銃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오석흥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민식
한자명
崔敏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43
본적
전라북도 정읍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3. 16 전북(全北) 정읍군(井邑郡) 태인면(泰仁面)에서 김현곤(金炫坤)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하여 시위 군중에게 배부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피체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최민식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