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항일독립의거추모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 276-68

사적지 지도 안내

길찾기   |   로드뷰

사적지 개요

항일 독립 의거 추모탑은 1919년 3월 14일 유천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과 왜인 응징사건, 그리고 내호리를  중심으로 당시 항일 독립 운동을 했던 동진회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유천장터 독립만세운동이란 1919년 파고다공원에서의 3.1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여 김보곤은 마을동지들을 규합하고 의명학당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4일 유천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일이다. 그러나 헌병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의명학당은 독립활동 모의거점으로 지목되어 폐쇄하였다. 이후 유호동장은 헌병대에 소환되고 자제단 가입을 주민에게 강여 주지하였다. 왜인 응징사건은 이어서 5월 7일 아침 7시경 청년 20여 명이 유천역에 정차중인 만주행 군용차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며 소동을 벌인 일로부터 시작한다. 오전 10시경 독립만세 함성에 주민 모두가 유호장터에서 감행하고 오후 4시경에 강제로 해산 당하였다. 다시 저녁 7시경 유호장터에서 "왜놈들아 물러가라!" 고함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인이 칼을 가지고 이종현의 입술을 결단내는 야만적 행동을 벌이자 급격히 운집한 주민은 왜인 7명을 처참하게 응징하였다. 결국 대구 헌병대가 저녁 9시 반에 군용차로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였다.  또한, 1941년 설을 맞아 청도군 유호리의 청년 10여 명이 모여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뜻을 모으고, 1월 27일 비밀결사를 조직하였고, 그 결사의 이름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일본 제국을 무너뜨리자’는 의미로 동진회(東進會)라 하였다. 본 단체는 항일독립운동 비밀결사로서 일제의 군수품 수송을 방해할 목적으로 철도, 경찰, 관공서 등의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할 계획을 세웠다. 또 농민회를 통해 농촌에 강요되는 황국신민화정책, 일상생활 통제의 국가총동원 체제 등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소년독성회를 통해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장차 동진회의 행동 대원으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1943년 9월 동진회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5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 10명은 1944년 12월 재판에 회부되었다. 허남귤과 이길우 두 사람은 부산형무소에서 옥중 사망하였다. 이상도(李相道)를 제외한 나머지는 공판 계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김도곤
한자명
金道坤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47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5.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유호동(楡湖洞)에서 이종현(李鍾鉉)이 일본인에게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인 3명을 구타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도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보곤
한자명
金寶坤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23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3.17 대성면(大城面) 유천(愉川) 장날에 만세시위 하기로 동지들과 같이 모의하여 태극기와 선언문을 제작 배포하고 마을 주민과 학생을 동원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하려다가 정보가 누설되어 주동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1년형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보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영곤
한자명
金永坤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45
본적
황해도 은율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26 황해도(黃海道) 은율군(殷栗郡) 은율읍(殷栗邑) 장터에서 장날을 기(期)하여 거사(擧事)하기로 이성춘(李成春)등과 결정(決定)하고 이날 모인 다수 군중(多數群衆)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를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영곤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용덕
한자명
金龍德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4 ~ 1982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44년 2월 경북(慶北) 청도(淸道)에서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5개월 여의 옥고를 치름.

김용덕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타관
한자명
金他寬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62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13일 경북 청도군 대성면에서 김보곤(金寶坤)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같은 달 14일 이를 알리는 통지서를 밀양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발송, 시위참여를 독려하며 유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음.

김타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서정기
한자명
徐正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3 ~ 1969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유천(楡川)장터에서 밀양공립(密陽公立) 보통학교(普通學校) 학생을 동원하여 독립만세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거사 당일 주모자로 일경에게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서정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규봉
한자명
李圭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6 ~ 1919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5.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成面)에서 이종현(李鍾鉉)이 일본인에게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본인 3명을 구타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살(被殺)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이규봉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길우
한자명
李吉雨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5 ~ 1945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41. 2 경북 청도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동진회(東進會)를 조직하고 소년회(少年會) 및 농촌친목회(農村親睦會) 등 하부조직을 이용하여 민족사상 고취와 농민봉기(農民蜂起) 등을 계획하고 활동하다가 1943. 9. 14 피체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여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고 함.

이길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무수
한자명
李武壽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43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5.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유호동(楡湖洞)에서 이종현(李鍾鉉)이 일본인에게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본인 3명을 구타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무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종학
한자명
李鍾學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43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5. 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유호동(楡湖洞)에서 이종현(李鍾鉉)이 일본인에게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본인 3명을 구타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4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종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종현
한자명
李鍾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29
본적
충청남도 청양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4월경 충남 청양군 정산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음.

인물정보

성명
정술문
한자명
鄭述文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0 ~ 1972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19년 3월 13일에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成面)에서 김보곤(金寶坤)으로부터 유천(楡川)장날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고 동월(同月) 14일 이와 관련한 통지서(通知書)를 전해받아 밀양보통학교(密陽普通學校) 생도(生徒)들에게 발송, 시위참여를 독려하며 유천(楡川)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려다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執行猶豫) 2년을 받음.

정술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조차상
한자명
趙且尙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95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청도(淸道) 유천(楡川) 3.1운동의 주모자의 한사람으로 거사요원 서정기(徐正基) 등 4명을 규합하여 시위군중을 동원하다 일경에 피체되어 6월형을 받고 심한 고문으로 좌안이 실명된 후 김진학(金鎭學) 등 과 군자금 700원을 모집하여 임정(臨政)에 전달하였으며 일제식민지정책에 항거하기 위한 동진회(東進會) 결사에 가담하고 일상품 불매운동과 독립사상 고취 등 전후 4년여동안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조차상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최선호
한자명
崔善浩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5 ~ 1981
본적
경상남도 부산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43년경 경북 청도에서 이길우(李吉雨)·허남귤(許南橘)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동진회(東進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에 반대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최선호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허곤도
한자명
許坤道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4 ~ 1951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5.7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 대성면(大城面) 유호동(楡湖洞)에서 이종현(李鍾鉉)이 일본인에게 부상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300여명의 군중과 함께 일인 3명을 구타하는 등 활동(活動)하다가 피체(被逮)되어 태(笞) 90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허곤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허남귤
한자명
許南橘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3 ~ 1945
본적
경상북도 청도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1

공적개요

1941.2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동진회(東進會)를 조직하고 소년회(少年會) 및 농촌친목회(農村親睦會) 등 하부조직을 이용하여 민족사상 고취와 농민봉기 등을 계획하고 활동하다 1943.7월 만주(滿洲) 독립운동가와 접촉하기 위해 만주(滿洲)로 가던 중 대전(大田)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였다고 하며,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순국(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허남귤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